불가사의(3)

미궁

by ou 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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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U3loZ7-drY


이 노래의 전체적 정서는 줄곧 일관되어 있다. 그래서 이 곡은 불가사의라는 앨범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울 수 있다.


이 곡은 성관계를 표현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충동의 부분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가장 이해하기 쉽다. 사실 섹슈얼리티라고 하는 부분은 인간에게 가장 흥미를 일으키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흔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남성기의 우월성에 집착하는 변태의 자기정당화라고 비난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한 오해는 많은 반박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간단하게 이야기해보면 프로이트가 말한 남근은 실제 남성의 성기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언어적, 상징적 존재인 인간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모든 상징을 대표하는 일종의 기호로서의 남근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앞선 글에서 말했듯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정교하게 만든 라캉은 초기 이론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신경증자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상징계(언어 시스템)의 대표 기호로 등장한 “아버지의 이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남근"이다. 남근이라는 상징을 중심으로 어떻게 의미체계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개인의 성격유형이 결정된다는 주장을 했던 사람이 프로이트이다.


이처럼 어떤 글을 쓸 때 섹슈얼리티에 관련된 이야기가 개입되면 다른 오해를 불러올 가능성이 있어서 오히려 정신분석을 이야기할 때 걸림돌이 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이 노래를 이야기하는 것도 건너뛰는 것을 고민했지만 섹슈얼리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섹슈얼리티의 존재이기 때문에 성적인 담론을 이야기해야만 인간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이야기하면, 이번 곡부터 도저히 나카모리 아키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어려워 네이버 블로그의 “길짐승”님의 가사를 참조하였다.

https://blog.naver.com/kilman1237/222116635148


현대로 오면서 섹슈얼리티의 양상은 크게 변했다. 과거의 섹슈얼리티는 남녀간의 합일이나 조화를 중시했다. 이러한 성관계의 은유는 다양한 형식으로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형상은 질료에 “삽입”되며, 그 안에 씨를 뿌린다. 이러한 은유는 “성관계가 가능하다”는 환상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브루스 핑크, 에크리 읽기 참조) 또한 영화나 드라마의 해피엔딩은 주인공 연인들이 모든 사건을 해결하고 영원한 "조화"를 이룬 상태로 끝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성관계는 불가능하다.” 여성과 남성이 안정적인 조화를 이루며 상대와 융합된다는 일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한 환상이 문명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말이다.


먼저 여성은 보잘 것 없는 남자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그를 멋진 남자로 바꾸기 위해 애정과 사랑을 투사한다. 따라서 여성에게 사랑의 대상은 자기만의 개별적이고 유일한 “하나”이자 "전체"이다. 여성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 자기의 욕망을 투여할 만한 특이하고 개별적인 전체를 사랑한다.

반면에 남성은 멋진 여자를 소유하여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환상의 대상으로 삼는다. 남성에게 사랑의 대상은 "부분대상"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쓸어넘기는 머리카락이나, 갸날픈 손목, 혹은 성적인 부분일 수 있다. 남자가 사랑하는 것은 여성의 전체, 유일한 하나가 아니라 하나에서 잘라진 부분대상이다.

라캉은 세미나11에서 부분대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불가해하게도

내가 사랑하는 것은 네 안에 있는

너 이상의 것 – 대상a – 이기 때문에,

나는 너를 잘라낸다.

(자크 라캉, 세미나11, 새물결출판사, 참조)


남성은 오직 상대의 부분만을, 여성은 오직 상대의 전체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엇나가는 사랑의 형태로 인해 “성관계는 없다.” 이처럼 완전한 융합이란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대로 섹슈얼리티의 논의가 끝난다면 더 이상 공부하지 않아도 되니 참 좋은 일이겠지만, 현대의 섹슈얼리티는 과거와 그 양상이 달라졌다.


단적으로 현대의 섹슈얼리티는 의존증적인 섹슈얼리티이다. 이러한 사랑은 중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인간은 무언가에 의존해야만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다. 또한 그 의존의 양상이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범주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의존 역시 대상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전의 섹슈얼리티가 대상을 자기의 방식으로 바꾸어 환상으로 재창조한 이후의 사랑의 성립이었다면, 현대의 섹슈얼리티는 대상을 자기화한다. 대상은 이제 자기의 안으로 들어와 관념화된다. 자기 안의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 다시 말해서 현대의 섹슈얼리티는 대상-사랑이 아니라 자기-사랑, 자기향락인 것이다.


이전의 사랑은 자기와 타자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대는 오직 자기와 자기만이 관계할 뿐이다. 자기 안의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말은 자기를 규정했던 기표인 S1에 중독된다는 뜻이다. 자기를 자기이게끔 만들어주었던 과거의 기표로부터 얻었던 쾌락, 그것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자기가 성립되고 거기서 사랑이 나온다. 이것이 현대의 섹슈얼리티이다.


따라서 현대의 사랑은 비록 그것이 성관계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 자기만의 향락이므로, 그것은 자기위안에 불과한 섹슈얼리티의 양상을 띤다. 상대를 귀엽고 성스럽고 숭고한 대상으로 간주했던 과거의 섹슈얼리티와는 다르다. 이제 사랑을 하는 행위 자체를 통해 자기가 숭고해지는 역전이 일어난다.


따라서 나카모리 아키나의 노래 가사처럼 상대를 속이고, 조종하는 사랑의 타자가 등장한다. 따라서 성관계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전처럼 부조화에만 그치지 않고 기쁘지만, 울고 싶은 일에 불과하다. 또한 이러한 사랑은 로망스의 영역으로 다룰 수 없기 때문에 숨기고 감추어야만 하는 비밀스러운 속삭임에 불과하다. 어쩌면 자기애와 자기애의 만남이라는 현대의 섹슈얼리티를 통해서 "더 나쁜(ou pire)" 융합이 이루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에는 자기밖에 모르는 의존적인 주체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향락사회론, 人文書院(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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