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무대는 달라졌지만 내 역할은 여전히 같았다. 나는 또다시 같은 위치에 서 있었고, 같은 질문이 목구멍을 맴돌았다. "왜 나는 항상 이 자리에 서 있는 걸까?" 하지만 곧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씨앗을 품은 토양은 새싹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지만, 자란 나무는 자신을 키워준 땅을 잊은 채 하늘만을 향해 뻗어 올라간다.
존재의 투명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존재는 본질적 기능을 수행할 때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이것이 순수한 매개체가 되려는 충동인지, 아니면 자기 소거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투명성이 타인에게 일종의 묵인된 허가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예스'만을 반복하는 존재는 언어의 단조로움 속에서 자신의 윤곽을 점점 잃어간다. 긍정의 무한한 반복은 결국 긍정 그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것은 진정한 동의가 아니라 부재의 신호다. 결국 "이 존재는 저항하지 않는다"라는 무언의 선언이 된다.
상처의 근원은 기대라는 이름의 비대칭성에 있다. 한쪽에서는 호혜성의 원리가 작동한다고 믿지만, 다른 쪽에서는 이를 이미 주어진 조건으로 내재화해 버린다. 베푸는 이는 베풂의 순환을 기대하지만, 받는 이에게는 그것이 이미 존재론적 전제가 되어버린다.
사진술에서 프레임은 세계를 자르고 나누는 행위다. 그 절단의 정치학은 결국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출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모든 것을 포함하려는 욕망은 프레임의 본질적 기능 자체를 무너뜨린다. 선택하지 않는 선택은 결국 선택의 불가능성만을 드러낼 뿐이다. 인간관계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모든 타인에게 같은 강도로 개방된 존재는 결국 누구에게도 특별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
깊이는 제한에서 비롯된다. 여백이 없는 공간에서는 의미의 농축이 일어나지 않는다. 관계에서의 경계는 배제의 구조가 아니라 의미 생성의 조건이다. 오직 그 경계 안에서만 진정한 만남의 가능성이 열린다. 경계 없는 친밀함은 역설적으로 친밀함 자체의 소멸을 의미한다.
2025년 6월 8일 이른 아침, Over coff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