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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왕자 aka C FLOW Jan 27. 2018

Risk와 Danger

상대적 자립을 묻는 고상한 장애인

Who are you

작년부터 닉부이치치와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다.


그와 메세지를 주고받는 일은 마치 20년전 PC통신 단말기로 일상의 감정을 나누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나 : Show respect for small daily routines

그 : I am friends with you, and you also show respect.

*구글 번역기는 언어의 장벽을 넘나든다:)


나와 다른 장애를 갖고 있지만, 보편적 삶의 스펙트럼에서 다소 빗나간 부류라는 점에서 때때로 동질감을 느낀다. 그 동질감은 나와 같은 한 가정의 아빠이고, 놀기좋아하고, 무대 위로 나서기 좋아하는 부분도 포함된다.


양팔이 없어도 드럼을 치는 모습, 자녀와 놀아주는 모습 등 일상의 모든 사건, 일상의 일들을 보편적 삶의 양식으로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음을 보며 사실 그날의 메세지에서 'Respect' 보다 'Envy'가 어쩌면 더 적절한 표현이었을지 모른다.


성경책을 입으로 열며 청중들에게 감동을 자아냈던 그, 한국에서 또한 TV출연한 모습에서 첫느낌은 사실 거부감과 적대감이었다. 상업적이었고, 감동으로 미화되고 있는 한 장애인으로만 보였다. 나는 줄 곧 그를 비판하려고 애썼다.


Could you give me some water?(불완전성과 완전성, 그 모호함)


그랬던 그를 다시 보게된 것은 유튜브에서 강연한 모습이었다. 사회자에게 목이마르다며 건넨 말 한마디, 난 그 말을 잊을 수 없다.


빨대가 들어간 한 잔의 물을 마시며 이어간 그의 말, 말끝의 또렷함은 어느순간 무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 시간은 이미 한 장애인의 신앙간증도, 인식개선강연도 아닌 삶의 사건을 풀어가는 유명 연예인으로 초대된 토크쇼 게스트였다.


난 사람들 앞에서 자립을 말하면서,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자립이 아니라 했다. 그럼에도 닉부이치치의 "Could you give me some water?"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 것은 왜일까?


자립은 선택과 결정이라고 정의한다. 거기에 동의하면서도 막상 일상에서 자립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선택과 결정은 무엇일까. 닉부이치치는 분명 갈증을 느꼈고, 그래서 빨대를 꽂은 물이 담긴 컵을 받고서야 비로소 갈증을 해결했다.


스스로 선택과 결정을 한 이 상황에 대해 도움을 받았으니 자립한것이 아니라 한다면 선택과 결정을 하지 않은 것이 되지만, 분명 닉부이치치는 선택과 결정을 하였다. 그 결과는 물론 누군가에 의해 실행되었어도 분명 자립한 것이 맞다. 그런 의미에서 새롭게 다가왔다면 나의 반성이 필요하다.


Risk vs Danger(불완전성에 대비한 완전함은 없다.)


닉부이치치는 물론 스스로 의사표현에 있어 '완전성'을 보고 신뢰한다. 그러나 모든 장애인이 닉부이치치와 같이 유창한 말솜씨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발달장애인의 경우 자립은 여기에서 부터 시작이 아니다. 우선적으로 선택과 결정할 수 있도록 경험의 폭을 넓히고, 그 결정을 존중해주는 태도에서 부터 자립적 환경이 조성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우리는 줄곧 발달장애의 의사표현을 '불완전성'으로 인식하고 선택과 결정을 거부하거나 모른척 한다.


우리는 '불완전성'을 'Danger'로 착각한다. Danger는 생명의 중대한 위협을 가하는 상황을 경고할 때 사용한다. 가령 낭떠러지 앞이나 고압전류가 흐르는 시설 등이다. 그러나 'Risk'는 다르다. 혹시 모를 실수나 경우의 수에 따른 위험이다. 그럼에도 발달장애인의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는 'Danger'로 받아들일 때가 훨씬 많다.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무언가를 완성하거나 개발하며 삶을 채워간다. 'Risk' 때문에 어떠한 일을 포기하기 보다 그것을 감내하여 성취할때 비로소 발전한다. 모든 인간은 그것을 감내하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완전 자립, 불완전 자립이 아닌 상대적 자립


나는 상대적 자립의 개념으로 삶을 바라보고 싶다. 무엇 보다 'Risk'를 자각하고 탐구하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내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누리는 것과 동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닉부이치치가 드럼을 배우고, 아빠가 되어 자녀를 안고 놀아주는 소소한 일상은 'Danger'로 바라볼때 결코 해서는 안되거나 위험한 일들 뿐일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럼에도 버티는 것이 아닌, 누릴 만한 것을 찾기 위해 'Risk'로 바라보고 함께 그 것을 헤쳐나갈 사람을 찾는 것이 내겐 더 중요하다.


갈증이나서 물을 달라고 요청한 것은 닉부이치치 였지만 물을 준 사람은 다른 누군가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을 직접 마신 사람이 본인 닉부이치치가 아니기에 그의 삶은 '불완전'하고 혼자서 할수 없기에 'Danger'라고 말한다.


닉부이치치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본인의 불완전성보다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해서 'Danger'라고 치부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이름 최충일.

집에서는 "아빠, 남편, 아들"이고
직장에서는 사회복지사 또는 "최 선생님",
무대위에선 "엄지왕자",
친구들은 "쪼까니"(키가 작아서)라 부른다.

그리고 지체2급 장애인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다양한
호칭과 별명을 갖는다.

그러나 "장애인"은 내게
호칭도 별명도 될수 없는 단어다.

어릴때 동네 꼬마들이 놀릴때 빼고는...
평소 사람들이 "장애인 안녕?"
이라고 한적은 없었다.

"장애인"이란 단어는 나의 삶가운데
지극히 한정된 상황에서만 불려지는
어색한 "middle name"이다.

중고등학교를 특수학교에서 졸업,
대학생활 힙합에 빠졌고 지금도 사랑한다.
직장이 있고 결혼하여 아빠가 되었다.
삶의 행복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싶다.

장애인이 아닌 아빠,남편,래퍼,직장인,아들로써...
삶의 다양성과 일상을 타이핑할 것이다.

*reference :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해(김진우 교수), 발달장애인권익옹호(이동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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