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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왕자 aka C FLOW Oct 18. 2018

나를 왜곡하는 사람들

내가 있어야 할 무리

"언제부터 그렇게 되셨나요"
"어떡해 일하세요"
"이 휠체어는 얼마인가요"

누군가는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의 질문, 내게는 수백번 귀가 닳토록 듣게되는 질문.

저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얼굴표정을 짓다, 결국 터져나오는 저런 질문들. 일상이 피곤하고, 눈이 침침해도 그 사람의 표정만 봐도 어떤 호기심과 감정인지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은 늘 마주하고 싶지 않은 예상가능한 시나리오 처럼의 이미 내 습관의 답변들로 이어지며 마무리는 안쓰러움, 혹은 걱정어린 시선으로 정리된다.

오랜 시간 노력 끝에 휠체어를 탔ㅈ만 주변의 도움으로 일상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내 존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 나는 여전히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분류된다.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이 일상에서 절절히 경험하고 있듯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휠체어 리프트의 음악 소리, 남녀가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화장실, 휘황찬란한 현수막을 걸어놓고 시행되는 후원금 전달식 등은 누군가의 자존감에 상처를 낸다.

장애인을 앞에 놓고 구원 이후에는 완전한 육체로 살 수 있을 거라 설교하는 종교인이나 방송에 나와 "내가 너를 걷게 하겠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 역시 내 존재의 가치를 미래의 구원에 맡겨야 한다는 의미나 다름없어 나를 침울한 열등감에 빠뜨린다.

우리는 장애와 질병으로부터 건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와 질병의 경험을 통해 마주할 건강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질병에 상시적으로 노출되며, 노인이 되면 결국 '장애' 라고 공인될 정도의 몸 상태로 변화한다.

사회적 책임이라며 사명감으로 누군가를 보호(케어)한다지만 사실은 그 '선'을 더욱 진하게 긋는 일들을 반복하며 더 견고하게 분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노력이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교과서에 장애이해나 인식개선 꺼리들의 교과목을 개설하는 등을 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비전을 품어본적 도 있었다. 그것에 기여한다는 것 만으로 굉장한 자부심으로 다가왔지만...내 몸의 근원적인 욕망과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랩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부류 혹은 환경)을 만나면서 부터, 중증의 장애나 질명을 가진 몸, 유약하고 매력없다고 치부되는 몸을 가진 나의 존재 자체가 그러한 자유를 지향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를 위해 나의 욕망을 과감히 표출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어떤 것도 비극적이지 않다는 태도, 엘리베이터가 없어도 계단 앞에서 누군가에게 업혀도 죄송한 마음이 들지 않을 자부심. 분명한 것은 억압된 욕망을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 거룩한 몸짓으로 포장되는 것은 왜곡된 그림이다.

다양한 협력이 결국 나를 '지체2급 장애인'이 아닌 '랩도 하며 휠체어를 탄 최충일'로서 무대위 '주연'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첫 공연(나사렛대학교 축제)과정이 마치 내 삶 자체인 것처럼 느껴졌다. 지체2급 장애인으로서 나를 다하는 왜곡된 시선과 관심이 나를 더 불구하고 연약한자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일반적으로는 누구도 기회를 주지 않는 현실에서 누군가 내게 기회를 주고, 그 안에 잠재된 가능성을 연대와 창의성으로 이끌어내 새로운 삶을 창안하는 방식. 거기에서 부터 삶을 살게 되는 것 같다.

만약 나에게 진심어린 사회적 연대가 아닌 눈물과 사랑만 가득했다면 난 마흔이 되어서도 누군가의 눈물과 사랑으로만 생존을 이어갔을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아무런 관계도 없고 교류도 없는 세계를 어떠한 계기를 통해 하나의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나처럼 랩이 될 수도, 그림이나, 악기, 글쓰기 등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사회적 연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의 관심사가 '나'의 관심사 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줄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건장한 신체의 청년들과 랩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연결 되는것, 나는 그것을 '커뮤니티' 라는 정의 안에서 가능한 방법으로도 볼 수 있겠구나 싶다. 아니 그렇게 말하고 싶다.

어디까지나 나만의 경험적 근거라는 제한점은 있지만 언젠가 정리해서 설명해주고 싶은 말들이다. 그런데 그 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나도 모르겠다...어제도, 오늘도 난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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