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외피로 둘어싸인 따뜻한 이야기
소위 SF소설을 많이 접하진 못했다. 배경지식이 얕은 내가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많았고, 그 이외에도 읽을 소설이 많아 우선순위에서 밀리곤 했다.
그나마 누군가의 추천으로 알게 된 테드창, 켄리우의 작품을 읽으며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매력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 중, SF 장르에 충실한 테드창보다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켄리우가 한 번 더 읽고 싶은 작가로 남았다.
김초엽의 소설은 켄리우의 감성에 테드창의 장르가 한 스푼 들어간 느낌이었다. 소설 속 창조된 우주를 독자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정교한 기술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도 그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관심, 사랑을 담고 있다. 그것도 촌스럽지 않은 담백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수만 년 전에 지구에 도착한 것이 사실이라면... 인간 지성의 진화와 문명의 탄생은 그들과의 공생을 통해 촉발된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을 가르칠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공생과정에서 그들의 지성이 인간에게 전이되었을 거예요.」- 공생가설 -
7살 이하의 어린아이의 뇌에서만 존재하는 ‘그들’의 존재가 인간성이라 믿어왔던 특성들을 주었다는 아이디어는 신선하면서도 친숙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어릴 적 내 안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순발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을 때 혹시 내 안의 다른 존재의 명령으로 내가 움직인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다. 엉뚱했던 나의 공상을 작가가 뉴런활성화패턴이라는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그럴 듯하게 현실에 닿게 해주어 나의 어린 시절이 한층 풍부해진 느낌이다.
소설처럼 ‘그들’이 ‘외계성’을 주입한다면 우리가 흔히 쓰는 ‘인간성’이란 명칭이 맞는 건지 스스로 자문해 본다. ‘그들’이 떠나도 성인이 된 인간에게 계속 존재하는 성질이기 때문에 ‘인간성’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듯하다. 특히 우리 인간은 원래 주어졌던 ‘인간성’을 유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오한 철학적 고민을 거듭하며 ‘인간다움’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닦은 주춧돌에 인간들이 기둥을 세운 ‘인간성’은 온전히 인간의 성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씩 살인범이나 성폭행범에 관한 뉴스를 접하다보면 사람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가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려고 노력하면 세상이 0.1mm 라도 좋아지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 믿는다. ‘인간다움’을 소중히 생각하고 잃지 않으려 노력하면, 우리에게 ‘인간성’을 선물해준 류드밀라 행성의 그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현하는 나름의 방법이 될 것 같다.
류드밀라의 ‘그들’이 먼 훗날 지금을 돌아보았을 때, 인간에게 ‘외계성’을 주었던 행위를 후회하지 않고 뿌듯해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