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거스 Nov 09. 2020

리처드 플래너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후유증이 진하게 남는 소설

 대서사라는 말이 어울린다. 한 인물에 대한 전기적 성격을 띠며, 전쟁의 참혹함에 더해 전쟁 후의 폐허와 후유증까지 다루고 있다. 책을 읽는 초기에는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초반의 늙은 에반스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은 우아하지도, 정열적이지도 않고 건조한 문체로 진행되어 50페이지를 읽었을 즈음 나머지 500페이지의 분량을 다 읽을 수 있을지 아득할 정도였다. 소설에 빠지게 된 시작점은 다키의 서사가 본격적으로 나오면서부터였고, 앞부분과 똑같이 건조한 문체임에도 감정이입을 하는 순간부터 모든 장면들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마음속에서 큰 울림을 주었다.


- 에반스의 사랑

 에반스와 에이미, 키스와 엘라는 서로 굉장히 닮은 사람들로 보였다. 키스와 엘라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각자의 배우자에게 상대방이 죽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배우자들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그 배우자를 붙잡기 위해 할 수 있는 행동이 거짓말밖에 없다면 굉장히 비참할 것이다. 결코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고, 또 그 거짓말이 밝혀질 때 각자의 배우자에게 미움을 받을 수 있다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본인들 입장에서도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지키고 싶어 자존심을 버린 키스와 엘라가 쓸쓸하고 불쌍해 보였다.

 에반스와 에이미도 닮았다. 둘 다 제3의 인물들과 바람피우는 것이 본인들의 배우자에 대한 정조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 이런 인물들이 있으면 이해받기 힘들지만 소설에서 우리는 그들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안다. 다른 사람들과 잠자리를 가지며 본인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자 하는 점이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으나 배우자들은 진심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평생을 서로 그리워만 한 두 사람. 생애 말미에 서로를 보지만 아는 척을 하지 못하는 부분은 진한 멜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들이 용기 내어 서로에게 말을 걸고, 커피 한잔 마시고 헤어졌으면 하는 나의 아쉬움만 남았다.


- 철도 건설 중인 포로생활

 책을 읽는 도중에 호주 병사들의 상태를 묘사하는 부분은 정말 눈으로 글자를 읽는 것조차 괴로울 정도로 비참한 부분이 많았다. 1940년대 2차 세계대전 끝날 무렵에 어떤 국가들이나 물자가 동이 난 상태고, 특히 전장에 있는 사람들은 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포로의 삶은 ‘인간의 삶’을 포기해야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위생과 영양의 부족으로 몸에서 고름이 나와도, 눈이 멀어도 매일 똑같은 시간에 기상해서 노동을 하고, 매질을 당해야 하는 포로들에게 존엄성을 잊지 말라고 하면 코웃음을 치지 않을까. 다키 가디너가 맞아 죽어갈 때 다른 포로들의 머릿속에는 빨리 끝나야 저녁을 먹을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가장 우선했다. 우리가 흔히 ‘인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한없이 가볍고 귀찮기만 했을 것이다. 다키의 죽음을 별생각 없이 지켜보기만 했던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간 뒤, 니키타리스 식당 안의 수족관 물고기들을 강가에 풀어주는 장면은 인간성의 회복을 표현하는 듯하다. 다키에게 그때 주지 못한 자유와 기쁨을 물고기들에게 대신 주며 미안함과 죄책감을 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평생을 다키가 죽을 당시에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음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괴로워할 것 같다.


- 전쟁의 후유증

 전쟁 그 뒤의 이야기가 먹먹하다. 보통 다른 영화나 소설은 전쟁 속에서의 그 다이내믹함과 슬픔을 극대화하여 휘몰아치는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전쟁 그 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어 전쟁의 참혹성이 더 두드러진다. 과연 나카무라는 가족에게 모기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착한 아버지로 남는 게 정의에 맞는 걸까. 고아나(최상민)는 고타 대령이나 나카무라 소령보다 더 악랄한 놈으로 평가받아야 하나, 아니면 역사의 희생양으로 인정해줘야 하나. 더 이상 흰 가운을 입지 못하는 의사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당시 고타를 비롯한 대다수의 일본군들은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일본이 전쟁에서 진 것을 아쉬워했다. 전쟁 후 전범들의 삶을 보여주며 악마 같은 인간들도 사실은 비극적인 역사의 흐름에서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동시에 잔인한 행위들을 후회하지 않는 일본인을 묘사하며 그들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인간이라는 것 또한 이야기한다. 반대로 일본군과 대척점에 있는 전쟁포로들 또한 해방되었어도 여전히 행복하기가 힘들다. 포로생활 중 에반스를 도와 중증환자들을 돌보기 자처했던 보녹스 베이커는 고국으로 돌아온 후 자살을 했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토끼 핸드릭스의 그림을 일본군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꼭 남겨야 된다고 주장을 하며 전쟁 후까지 미리 그려보았던 베이커는 왜 그 삶을 견디지 못했을까. 수탉 맥기스는 전쟁 후 말이 부쩍 많아졌다. 다키가 본인의 오리알을 가져갔다고 오해하며 분노를 느낀 것을 사과를 하지 못했던 죄책감에 계속 말을 하면서 갈증을 풀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해외 소설 중에서 일본 군과 한국인의 관계를 이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한 문학이 있을까. 보통 나치의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많이 다루어져서 그 처참함과 독일과 다른 유럽 간의 관계 등에 대해 동양인들도 어렴풋하게 알고 있지만, 일본의 침략전쟁 속 아시아 모습은 그동안 문학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소설 속에서 한국인이나 중국인의 묘사가 세밀하고 사실적이어서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감정적으로 동화되어 읽기 힘들었다. 내가 마치 소설 속 최상민이 되는 것 같아 비참함과 죄책감이 동시에 들었던 것 같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고, 바꿀 수도 없지만 일본의 침략은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되는 역사이고, 이런 책들을 통해서 그 다시 아픔을 겪었던 분들과 그 후손들이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기 바란다.

이전 04화 오건영 '앞으로 3년 경제전쟁의 미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