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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스 Dec 27. 2020

김금희 '복자에게'

우리에게 쓰는 편지

영초롱이에게


영초롱아 안녕. 너에게 편지는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테지만 이 편지는 쓱 한번 읽어보고 아무 데나 던져놔도 되는 편지니 맘 편히 읽어.


아마 너와 나는 동갑이거나 기껏해야 한두 살 정도 차이가 날 꺼야. '유리가면'과 '베르사유 장미' 속의 주인공들의 고군분투를 기억하는 세대라고나 할까. 너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나와 비슷한 면들이 보여. 유년시절에 대한 동질감 외에도 도배를 하겠다는 선배에게 노출콘크리트가 유행인 지금 되겠냐는 조소를 보내거나, 제주도에서 살았던 것까지. 비슷하다는 건 때로는 거북하다는 의미와도 같아서 우린 실제로 만나면 피차 가까이하지 않을 사이가 될 것 같네.


나도 너와 마찬가지로 서른을 넘긴 나이에 제주도에서 햇수로 3년간 살았었어. 제주도로 간다고 했을 때 주변사람들이 모두 이효리처럼 살다오라고 그러더라. 물론 너도 사람들에게 질리도록 똑같은 말을 들었을 거라 생각해. 이효리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살짝 기대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려면 일단 마당이 있는 큰 집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어디에서 살든 내 경제력에 맞춰서 쳇바퀴 돌듯 비슷한 삶을 살더라.   


네가 묘사한 제주말들이 그 억양 그대로 귀에서 들리는 듯 해. 음성지원이 된다고나 할까. 딱히 제주에 대한 향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기’, ‘어신디’ 등등의 말이 나에게 바다 냄새처럼 흘러들어오네. 그 당시에는 무덤덤하더라도 지나고 나면 과거가 예쁜 추억으로 포장되는 느낌이야. 


너도 뿔소라 좋아하지? 나도 제주에서 살 때 시장에서 뿔소라를 팔면 꼭 1kg씩 사서 집에서 삶아먹었어. 사실 내가 산 뿔소라가 제주산인지 중국산인지도 확실치 않았지만 제주도에서는 왜 그렇게 그게 맛있었는지 몰라. 큰 냄비에 쪄서 이쑤시개로 알맹이만 쏙 빼서 통째로 새콤달콤한 초장에 찍어먹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네가 복자와 처음 만난 날이 눈에 그려지는 듯해. 그늘로 쓸 만한 가로수도 하나 없는 땡볕이라 제주도는 봄이라도 덥지. 겨울조차 패딩을 입은 날 더워서 하루 종일 패딩을 팔에 걸치고 돌아다녀서 팔이 아플 때가 더러 있잖니. 복자와 계속 걸어가면서 이 아이한테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줘야 하나 고민하는 너의 귀여운 생각들이 햇빛에 반짝거리는 섬의 바다와 어울렸을 것 같아.    


우린 모두 어릴 때 왜 그렇게 스스로를 포장하려고 노력했을까. 백과사전을 다 외우고 있다는 허세, 서울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우체통 위치를 알려주는 무모함 모두 공감 가서 마음이 한 켠이 아려왔어. 남들의 인정을 받고, 스스로가 잘나 보이는 게 그 시절에는 너무 중요했지. 그러다 보면 사소한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감당이 안 되는 경우도 종종 생기곤 하잖아. 한편으로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에 무리를 하던 시절이 그리워질 때도 있어. 세상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더 이상 용쓰지 않게 되는 게 더 슬플 수도 있겠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초등학교 개교 기념식이 끝난 후 복자의 파란색 지붕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었니? 복자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미안함 때문이었니, 아니면 그 뒤로 연락 한번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때문이었니? 난 네가 그 관계를 끝까지 회복하지 못했다는 후회 때문에 복자에 대해 더 아쉬움이 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너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어. 근데 네가 서울로 올라온 뒤 편지를 부쳤으면 복자는 아마 답장을 해주었을 거야. 시간이 흐르다 보면 섭섭함과 미안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니까. 다만 그 시간이 어른보다 더 길고 아픔이 오래갈 뿐이지. 복자가 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걸 느꼈을 거야. 네가 복자나 이선고모를 좋아하지 않아서도,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아서도 아니라 단지 어린아이가 가지는 순수한 악의로 그렇게 행동하였음을. 어른 남자가 겪을 곤란에 대해 은근한 승리감을 얻고 싶은 순수한 악마가 너의 마음속에 서 유혹했음을 깨달았을 거야. 복자가 좀 더 성숙해진 뒤로 네가 편지를 썼다면 복자는 답장을 했을 것 같아. 


넌 제주도에서 말을 하지 않은 적이 있었지. 복자와 너를 불행으로 몰아넣고 이선고모와 나의 고모에게도 상처를 주었다는 죄책감에 말을 하기 싫어했었던 그때. 사실 난 지금도 그래. 누군가에게 말실수를 하거나 내가 상처를 받으면 때때로 혀를 움직이거나 입을 열어서 어떤 소리도 만들어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 제주도에서 살던 너보다 두 배가 넘는 나이를 먹은 현재의 나는 아직도 이렇게 살고 있네. 성숙해지는 건 정말 힘든 일이야. 지금의 너는 어떨지 궁금하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프랑스도 매우 위험하다고 들었어. 아직도 이동제한 조치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쭙잖은 조언을 해보자면 네가 윤호를 한번 만나러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윤호와 만나서 그의 마음을 볼 자신이 없었던 예전의 너에 대해 말해줘. 윤호는 그 누구보다 널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 너와 난 비슷한 구석이 많다고 내가 말했지. 내 말 믿고 한번 가보렴, 윤호에게.


건강하고, 계속 너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살 수 있기를 바랄게. 이건 사실 나에게 하는 소리야.


오늘도 안녕하기를. Keep you safe!


정말 이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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