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불안한 감정의 소용돌이
이 책을 읽기 시작하였을 때는 에세이인 줄 알았다. 책 앞부분에서 저자를 짤막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삶의 배경이 책 속 주인공과 비슷하고, 실제 있을 법한 내용이라서 저자의 경험을 쓴 책이라고 생각했다. 읽는 도중에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장편소설로 분류되어 있어서 소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화가 아니어서 덜 재미있거나 흥미가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시점부터는 저자가 경험담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위장한 것이 아닐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하며 책을 읽었다.
소설의 제목처럼 주인공이 청년시절 대학을 다닐 때 겪었던 감정의 혼란에 대해 묘사한다. 한 사람이 가지는 감정에 대해 이렇게 극사실적이고 세밀한 묘사를 읽은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내가 20대 초반에 가졌던 감정도 떠오르게 만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좋아해서 사학과에 지원했고 이 학문으로 내가 평생 살아갈 수 있으면 정말 행복할 수 있겠다는 부푼 꿈이 있었다. 그 당시 가졌던 학문에 대한 순수한 태도나, 담당교수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갈증과 열망도 있었다. 「감정의 혼란」 주인공이 마음속으로 하는 독백에서 나도 학문을 진심으로 열망했었던,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던 반갑기도 쓰라리기도 한 기억이 소환되어 마음이 한편이 말랑해진 기분이다.
주인공은 학문의 큰 뜻이 없었지만 아버지의 의지로 베를린의 한 대학에 간다. 충동적이며 풋내기 젊은이였던 그는 쾌락을 좇는 방탕적인 나날을 살다가 아버지의 충고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작은 도시의 학교로 옮겨 학문에 다시 정진하고자 한다. 담당교수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의 수업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고, 교수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해서 학문적으로, 인간적으로 교수의 모든 면을 배우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가끔씩 교수가 본인에게 보내는 냉담함과 아픈 말들에 상처를 받는다. 자신은 교수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고, 기분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데 교수가 가끔씩 쌀쌀맞게 돌변하거나, 의도적으로 냉정하게 비꼬며 본인에게 상처를 주면 어린 그는 그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혼란스러움은 독백으로 잘 나타난다.
무의식 중에 나를 뜨겁게 만들어 놓고 느닷없이 얼음을 쏟아붓는 사람, 자신의 격정으로 스스로를 자극하더니 갑자기 반어적인 언어의 채찍을 움켜쥐는 사람, 이렇게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돌변하는 그 사람에게서 나는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교수는 주인공에게 이런 식으로 상처를 주지만 또 언제 그랬나는 듯이 다시 잘 대해주고, 이러면서 주인공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기분을 느낀다. 주인공이 도서관에서 교수의 책을 찾아보던 중 교수가 젊은 시절 끝내지 못한 책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책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필기를 대신해주는 것을 자처한다. 교수가 책에 들어갈 내용을 말로 하면 주인공은 부지런히 필기를 하는 과정을 반복하여 책의 1부를 완성한다. 교수가 책 1부가 완성되었다고 말했을 때 주인공의 심정이다.
그가 처음으로 평화의 광채를 발하며 마음으로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혀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은밀한 숨구멍을 통해 나오듯 꽁꽁 숨겨진 기쁨이 흘러나왔습니다.
불후의 명작을 완성하였다는 사실에 두 사람 모두 행복해하지만 곧이어 교수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교수에게 또다시 냉대받았다는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교수와 인연을 끊기로 결심하였을 때 교수가 그에게 그토록 주인공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지 설명한다.
객관적인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책의 중반부터는 교수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처럼 본인이 직접 그런 일을 겪는다면, 그것도 20대 초반의 청년이라면 교수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덕분에 독자들은 주인공이 교수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와 교수가 그를 칭찬할 때 느끼는 기쁨과 환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자살을 했다. 유서에서 본인을 성급한 사나이라고 지칭한다. 「감정의 혼란」책에 나온 주인공이 저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주인공처럼 결이 섬세하고 감정에 충실한 사람은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을 온몸으로 맞이하였을 때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었을 것 같다. 소설은 주인공의 청년시절에서 끝나지만 만약 이 주인공의 노년을 상상해본다면 눈을 감는 날까지 근심 없이 행복하게 살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