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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훈 Sep 11. 2022

제사문화에 대한 고찰

제사문화를 바꾸자

벌써 삼 년이 지났다. 자식이 없이 돌아가신 작은아버지는 숙모가 돌아가신 후 2년 동안 하도 슬프고 그리움 가득한 노래를 불러 듣는 이를 애달프게 했다고 동네분들이 얘기했다.


 자식이 없으시니 무슨 일이 생기면 다 내 몫이었다. 벌어 놓은 큰돈이 없이 그렇게 가난하게 사셨다.


가끔은 나도 그게 싫었다. 우리 집에도 6녀 1남으로 나 혼잔데 작은아버지 어머니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게 무슨 업이 있어 이러는 걸까 억울해하고 화도 내기도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빚도 아들의 몫이었다. 갚는데 5년이 걸렸다. 내게 빚만 남기시고 가신 아버지... 작은아버지와 숙모님은 제사나 명절 때는 왕복 두 시간이 넘는 길을 모시러 갔다가 모셔다 드렸다. 좋은 차로 조카가 모시고 왔다 갔다 하는 걸 동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에게 기 안 죽을라고 그러신다는 걸 나도 알았다. 그런 게 두 분의 자랑이었다. 내가 27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할머니도 모셨다. 작은 아들 집에 안 가시고 손자랑  사시겠다고 했다. 정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어른 모시기...


주변에 욕만 들어먹는 장남이라는 위치...


여자는 시집가면 그쪽 귀신이라지만 험담하고 간여할 때는 우리 집 귀신보다 더했다.


작은어머니는 더했다. 내 앞에서와 뒤에서의 말은 180도 달랐다. 어머니에게 밍크코트를 사드릴라 하면 작은어머니도 해 드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말이 나온다. 사드려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숙모는 얘기도 늘 빙 둘러말하셨다.


"애비야, 어디 가니까 식은 밥이랑 식은 국을 탁 넣고 한 바꾸 뺑돌리니까 금세 뜨시지던데 그런 거 하나 있으면 좋겠다. 할배 밥물 때 있으모 좋겠더만"


"아 그거 전자레인지라 하는 겁니다. 제가 사드릴게요"


 아내와 의논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기능 많은 거 사드려봤자 쓰지도 못하니 제일 기본으로 하자고 하고 사다 드렸다.


며칠 있으니 누나한테서 전화가 왔다. 제일 싼 거 사서 보냈다고 하신 모양이었다. 기본이었으니 제일 싼 거 맞다.

냉장고가 양문이 아니라는 둥 세탁기를 통돌이로 사주더라는 둥 사주고 욕만 먹는 게 일이었다. 아내는 지금도 10년이 넘은 통돌이를 쓴다. 얼마 전 모터가 고장 났을 때도 그냥 모터 교체만 했다. 도대체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드럼세탁기가 필요할까? 건조까지 돼서??

 나와 아내 생각이 짧은 건진 모르겠다. 다들 드럼 드럼 하니까. 청소기, 전기면도기, 전기포트... 그런 거 사다 드리고 가보면 제대로 쓰시지도 못했다.


 아내는 넘들 다 있다는 명품가방 하나 없이 다녔다. 그런 거 필요 없다고 했다. 언젠가 주식을 하다가 하루에 오백만 원이 넘게 올랐다. 단타를 배우던 때다. 바로 팔아서 아내에게 줬다. 보태서 가방 하나 사라고...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것도 애껴든다. 큰 거 하나 작은 거 하나.


우리도 그렇게 산다.


어쨌든 아내와 나는 그런 소리를 들어도 그렇거니 했다.


 숙모님이 몸이 안 좋아 입원을 했었는데 평소 무릎이 안 좋으신데 때마침 인공관절 얘기를 꺼내셨다.


병원에서는 의사가 혈압도 있고 하니 '할매 그냥 지팡이 짚고 다니시라'고 했다. 수술이 위험할 수 있다고 권하지를 않았다.


"애비야, 내 죽어도 좋으니 함 해도고.."


입살이 보살이라고 하던가. 숙모님은 수술 후 옆 환자 가족이 먹고 있는 사과를 보고 


"그거 쪼매 한 쪼가리 무 보모 좋겠다"


그걸 드시다가 사래가 들려 기도가 막혀 의식을 잃었다. 그 후 8개월 동안 중환자실에서 식물인간으로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그거 화장한 뒤에도 멀쩡했다. 까맣게 타긴 했지만 녹지 않고 원형 그대로였다. 같이 묻어드렸다. 


 그 후 2년 뒤 작은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시고 그날 밤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나니 보험금과 위자료와 전세금을 합쳐 돈이 조금 생겼다. 가해자 쪽에서 위자료 해결을 깡패까지 동원했다. 나도 무술을 합치면 10단이 넘는다. 나를 붙잡는 걸 확 튕겼더니 소파와 탁자와 함께 나뒹굴었다. 


"제삼자는 관여하지. 마라. 그러면 더 어려워진다."


그 한마디에 소란이 없었다. 나중에 그 가해자 남편과 깡패가


"와~~ 진짜 내공이 대단하십니다. 무슨 운동했습니까? 행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더니 그 이후론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언젠가 어떤 모임에서 앞에 앉아 있는 남자 둘이서 수군 되는 게 나보고 그러는 거 같아 왜 그러시냐 했더니, 


"저... 무슨 운동하십니까?"


했다. 


"운동 안 합니다"


고 했더니 자기들은 모대학 체육학과 교순데 내 팔근육을 보더니 저건 헬스 같은 걸 해서 생긴 근육이 아니라고 생각돼서 물어본다고 했다. 


"40살까지는 검도를 했지만 지금은 안 한다. 안 한 지 15년이 넘은 거 같네요"했더니 그 이후론 말이 없었다.


내 장딴지 근육을 보고 헬스장에서 젊은 사람들이 그러기도 했다.


"와~~ 이거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그때 나는 헬스장 다닌 지 일주일쯤 됐었다. 뒤에서 내 장딴지를 감상하고 있었다.


60이 넘고 큰 수술로 갈비뼈를 4개나 잘라낸  지금은 그냥 근육이 반쪽에 배 나온 할아버지다.


각설하고...

상속이라는 제도가 웃겼다. 지금껏 뒤치다꺼리한 아내와 내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모두 형제자매가 우선이었다. 돌아가신 고모님 몫은 그 자식들에게 대속 상속이라는 게 되었다. 고모들과 누나들과 자형 그리고 큰고모 아들인 사촌 형이랑 의논을 해서 모든 걸 내게 맡기기로 했다. 


그런데 보험금을 타려니 상속인들의 도장이 필요했다. 이때부터 사달이 났다. 법적으로 지분을 나누자는 소리를 내는 고종사촌들이 있었다.


사는 동안 전화 한 통 없었고 얼굴도 잘 모르는 작은 외삼촌의 죽음에 자기들 몫 타령이 나왔다. 도장을 찍어주지 않으면 보험금 지급이 안된다고 했다. 


결국 그들 의견을 들어줬다. 나중에 보니 내가 그들에게 주려고 했던 돈보다 훨씬 작았다. 욕심이 부른 일이다. 재산을 엄청 남겨두고 돌아가신 줄 알았을까? 


법대로...


법대로... 참 좋은 얘기다. 그러나 법보다 사람의 인식과 인정이 중요한 것이다.


'지금껏 두 집 아들 며느리 노릇한다고 애썼다'


이런 얘기하는 사람은 가까이서 지켜보던 큰 누나들 뿐이었다. 내가 장례식장에서 통곡을 했던 기억이 난다.


 서설이 길었다. 오늘 작은아버지 기제사는 아무에게도 미리 기별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정말 아무도 오지 않았고 그 누구도 오늘 작은아버지 기일이지 하는 사람 없었다. 하다못해 전화로라도 제사 못 가서 미안하다는 얘기조차 없었다. 설거지를 하던 아내가 그랬다.


"돈은 다 챙겨 가지고 가더니 제삿날도 모르네"


사람이 사는 건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있어야 한다. 법보다 먼저 양심이 있어야 한다.


내가 큰아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장남으로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아빠가 죽고 나면 제사도 지내지 말고 벌초도 하지 마라. 모두 교회 다녀라.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다 정리하고 갈 거다."


 나는 고조부모 증조부모 백조부 조부모 아버지와 큰어머니 숙모 삼촌의 11개의 제사와 명절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모두 내외분을 합쳐서 지낸다. 백조부도 증조부모 제사에 합쳤다. 그래도 설 추석 제사를 포함해 7번이다. 한 번에 최소 20~30만 원이 든다.


한해 제사 비용만 400만 원이 넘는다. 그걸 30년을 해왔다. 생각이 있는 이들이라면 내게 그런 요구를 하지 못할 것이다. 작은 아버지일로 생긴 그 돈으로 앞으로 30년이 넘도록 또 내 아들이 제사를 지낸다면 턱도 없이 모자란다.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지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30년을 벌초 다니고 모사에 참석하고 한 것까지 생각하면...

돈이 문제가 아니다. 


힘들다는 소리 한번 없이 모든 걸 다 쳐내는 아내가 고맙다.




제사문화... 이거 이대로는 안된다. 바꿔야 한다. 유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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