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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훈 May 15. 2022

나 어릴 적에

나 어릴 적에 우리 집은 우물이 없었다. 동네에도 우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머니가 새벽에 산골짜기에 있는 옹달샘으로 물을 길으러 가셨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 깡통에 촛불이나 기름 종짓 불을 넣어 함께 갔다. 아마도 새벽 네댓 시쯤이었을 거다. 왜 그리 이른 새벽에 갔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머니만 따라다녔을 뿐이다.


집안에 사내아이가 나뿐인지라 어머니는 어리지만 사내아이 꼭지라고 든든해 하셨다. 한 손엔 불이든 깡통을 한 손엔 부지깽이를 들고 제법 무사처럼 경계를 하며 어머니를 에스코드 했다. 사실 무서웠을 거다. 어머니가 계셨으니 힘이 났을 거다. 10살도 안된 때이니 뭔 전투력이 있었겠는가? 내가 초4가 되었어야 동네에 우물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지금의 대연동 황령산 자락 어딘가였다. 물을 길고 있으면 산꼭대기에서 여우가 캥캥거리고 돌이 위에서 굴러 떨어지곤 했다. 그 당시 어머닌 삼십 중반이셨고 나는 열 살이 채 안 되었을 때다.  

지금은 플래시도 있고 여우도 없고 수돗물이 펑펑 나오니 그런 시절 이야기가 아이들 귀에 들기나 할까?


 겨울이면 귀가 찢어질 듯했고 손등이 갈라져 피가 나기도 했다. 방한되는 옷도 변변한 게 없었다. 방안에 둔 물그릇이 얼어버리는 날이 허다했다. 집이란 게 아버지와 고모가 블록으로 대충 지은 것이라 외풍이 심해 안이나 밖이나 기온차가 별로 없었다. 방안에서도 입김이 나는 엄동설한이었다.


 집 앞은 군부대가 있었고 철조망 앞으로 와 군인 형아들이 사달라는 과자를 사주면 한 봉지씩 얻어먹는 게 유일한 재미였다. 항상 협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살던 곳엔 군부대가 늘 있은 듯하다. 5, 6학년 때는 지금은 부산 시민공원이 된 미 하야리아 부대가 있는 동네에서 살았다. 일찍이 "헬로" "기브 미 쬬꼬레또" "기브 미 껌" "땡큐" "땡큐 베리 망치" "뻑큐" "선 어버 비치" 등의 본토 영어를 구사하던 시절이었다.


 옆집에 아이노꾸(혼혈아)인 준이(실은 죤이었음)가 살고 있어서 부대로 무단 잠입도 몇 번 시도했었던 기억이 난다. 담벼락을 넘으면 하야리아 미군부대였다. 내 기억엔 꽤 높았다. 거기를 우리는 발이 들어갈 구멍을 내어 담을 넘었다.


 준이 아빠가 미군장교였었는데 들키는 날엔 혼이 났었고 군인들이 와서 시멘트로 구멍을 메웠다. 그러면 또 우리는 구멍을 내고... 생각해 보면 준이 아버지는 그렇게 많이 혼내지는 않은 듯하다. 준이는 혼혈아라 동네에 친구가 없었다. 내가 유일한 친구였다.


 준이 집은 보통의 집 네 채를 한채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마당으로 만들어 마당이 운동장만 했다. 거기에 자전거를 비롯해 온갖 장난감이 넘쳐나 나는 학교 갔다 오면 대부분 준이 집에서 놀았다. 여동생 크리스틴도 있었는데 인형같이 예뻤다.


중학교에 가서 영어를 배우고 준이 미국으로 들어가 편지를 주고받을 때 비로소 준이가 Jhon이라는 걸 알았다.



신영호 作/수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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