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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훈 May 09. 2022

얼마나 행복하세요?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는 우리집이 없었다. 늘 남의 집 셋방살이였다. 내가 7살 때 쯤 부터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늘 등록금을 제때 내지 않아 벌을 서곤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내 기억엔 수학여행을 안가는 녀석들은 학교에서 자습을 하거나 공장 견학을 다녔었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연히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하던 때다. 그것도 산꼭대기에 있는 집이었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온 동네가 다 보였다. 빽빽한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많은 집들 중에 우리 집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서글펐다. 그리고 의지가 타올랐다. 집을 살 거다.

대학 때였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차창 아래 젊은 여자가 자가용을 운전하고 있었다. 그때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면 차부터 사야지 하는 생각 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내가 27이던 해 갑작스레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뇌졸중이었다. 졸지에 가장이 된 것이다.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두 여동생을 책임져야 했다. 가운데 미닫이가 있는 남의 집 셋방에서 살았다.


서른이 되었다. 결혼을 했다. 친구들은 모두 27즈음에 결혼을 했다. 나는 한참 늦은 때였다. 나 역시 남의 집 셋방살이였다. 그것도 방 한 칸짜리였다. 둘째가 태어날 때까지 한 칸짜리 셋방에서 살았다.

아이들과 함께 움직이려니 차가 절실했다. 아내는 아이를 업고 안고 기저귀 가방을 들고 다녔다. 비라도 오는 날엔 낭패였다. 차부터 샀다. 남의 집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놈이 집주인도 없는 자가용을 사서 담벼락 옆에 세워두었다. 집주인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차를 마음껏 주차할 수 있는 집이 필요했다.

작은 시영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방도 두 칸이었고 작은 거실도 있었다. 물론 전세였다. 17평 작은 아파트지만 처음 살던 단칸방에 비하면 대궐이었다. 아이들도 살 판이 났다. 연년생인 둘째가 막 걸음마를 시작하던 때다.

2년 뒤 30평 아파트로 옮겼다. 물론 전세였다. 이때 변두리에 아파트 하나를 분양받았다. 34평짜리였다. 나이도 34이었다. 36에야 그토록 원하던 내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의 기분이란 어찌 표현하랴.




행복이란 무엇일까? 차를 사고 아파트를 사고 그러면 행복일까? 행복이었다. 기분 좋은 행복이었다. 내 집에서 집주인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 사는 행복, 복잡한 버스 대신에 내 차로 출퇴근하는 행복,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행복, 모든 게 행복이었다.

그런데 집을 사고 차를 사는 행복은 딱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그 후부터는 습관적으로 차를 바꾸고 습관적으로 집을 사고팔았다. 행복은 아주 잠시였다.


심리학자들은 가진 것을 늘려도 행복지수는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고 한다. 행동경제학자들도 인정했다. 나도 인정한다. 행복은 스스로 만족하는 어느 수준의 정도까지가 그 한계인 듯하다. 더 이상의 욕심은 행복과는 무관하다. 그저 탐욕일 뿐이다.


만족하는 삶, 그것이 행복인 것 같다.



신영호 作/수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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