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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y Mar 31. 2022

스페인 작은 도시에 정착하기. 03화

03화. 끝없는 기다림과의 싸움 속에 지쳐만 가고

스페인에 오기 전 한 스페인 관련 블로그에서 글을 읽었다.

스페인에서 생활하려면 기다림의 문화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놓았다.

 

"끝없는 기다림의 나라. 내일 할 일을 오늘 하려고 하면 안 되고, 오늘 할 일도 오늘 끝내려고 하지 말아라."


처음에는 이 말을 농담처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뭐, 사람 사는 동네인데 별 거 있겠어?"

"한국인의 헝그리 정신과 매운맛을 보여주자고!!!"


그렇게 호기롭게 시작한 스페인 생활을 1년 정도 보내고 든 생각은 한국처럼 생각하고 한국처럼 생활하고자 하면 본인만 손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스페인에 외국인이 와서 정착하려면 다양한 절차가 필요하다.

1. 핸드폰을 개통해야 한다.

2. 은행 계좌를 개설해야 한다.  

3. 살 집을 구해야 한다.

4. 인터넷을 신청해야 한다. 

5. 주거 등록신고를 해야 한다.

6. 외국인등록증 신고를 해야 한다.

7. 건강보험을 신청해야 한다.

8. 만약 운전이 필요하다면 운전면허를 교환해야 한다.  

.

.

.

이 외에도 직장이 있는 경우 사회보장제도 가입을 위한 공보험 등록을 해야 하며, 한국에서 보낸 짐의 면세를 위한 세관에 면세신고도 아울러 필요하다.


만약 한국이라면 오전에 통신사에 방문해서 핸드폰을 개통하고, 동사무소에 들려 전입 신고를 하고 점심을 먹은 후 은행에 방문해서 계좌를 개설하고 남은 시간에 병원에 들려 진료를 받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이런 일을 하루에 해결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아니! 절대 불가능하다.

 



이곳에는 대부분 은행, 병원, 관공서 업무를 보려면 시따(Cita)라고 하는 예약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관공서 업무는 반드시 시따가 필요하다.

그런데 시따를 잡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

정말 재수가 좋아서 빠르게 시따를 잡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관공서는 시따를 잡으려면 기본적으로 2~3주 또는 길게는 1~2개월이 소요된다.




핸드폰 개통은 여권만 있으면 개통할 수 있어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제부터 뫼비우스 띠와 같은 끝없이 반복되고 풀리지 않는 행정 절차가 시작된다. 


스페인에 도착해서 우선 집 계약을 해야 하는데 계약을 하려면 은행 계좌가 필요하다.

은행 계좌는 외국인 등록카드인 TIE 카드가 있어야 만들 수 있다.

TIE 카드 발급은 경찰서에서 해야 하는데 시따를 잡는데 보통 1~2개월이 소요된다.

TIE 카드 신청서와 각종 서류를 접수하고 발급받는데 또다시 2개월 정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TIE 카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최소 4~5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TIE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엠빠뜨로나미엔또(일명 엠빠, Empadronamiento)라고 하는 주거 확인증이 필요한데, 엠빠 시타만 잡는데도 2~3주의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주거 확인증은 집 계약서가 있어야 발급받을 수 있다. 


위에 글을 다시 반복해서 읽어보면 상식적으로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행정절차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 한국 교민들이 스페인에 와서 가장 많이 고생하는 것이 이런 복잡한 행정절차와 시따 등의 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위에 끊임없는 연결 고리를 끊으려면 우선 은행 계좌 개설이 제일 절실했다. 

나는 운 좋겠도 지인 찬스 도움을 받았다.

회사 동료 남편이 은행에 근무하고 있어서 TIE 카드 없이 은행계좌 개설을 할 수 있었고, 은행 계좌를 바탕으로 집 계약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집 계약 후 집에서 사용할 인터넷을 설치하려고 집 근처에 있는 통신사에 호기롭게 방문했다가 TIE 카드가 없다는 이유로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그 이후에 2~3 곳 추가로 동네 통신사에 방문했지만 똑같이 TIE 카드가 없다는 이유로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아내하고 통신사에서 단호하게 거절당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데 왜 이렇게 서럽고 속상하던지......

   



이런 기다림의 연속은 다양한 생활 속에서도 필요하다.


어렵게 계약하고 입주한 집에 처음에는 안 보이던 하자가 여기저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꾹~ 참고 살까 하다가 앞으로 2년을 살아야 하는 집이라서 부동산에 연락해서 수리를 요청했다.

그리고 조만간 기술자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 흘러 아무리 기다려도 기술자를 보낸다는 연락이 없다.

그래서 또 연락해서 하자 수리를 재촉했다.

그랬더니 며칠 뒤 오후 4시에 수리공이 집으로 방문할 테니 집에서 기다리라는 연락을 받았다.


오후 4시에 기술자가 온다고 해서 회사에서 일부러 일찍 퇴근해서 집에서 기다렸다.

5시.... 6시.... 기술자가 안 온다.

그래서 다시 연락을 했더니 지금 가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다.

결국 4시에 온다고 한 기술자는 7시가 다 되어서 도착했다.

그것도 공구도 안 가져온 빈손으로......


"어?, 왜 공구를 안 가지고 왔지?"


기술자는 집에 발생한 하자를 쭉 한번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시 오겠다는 얘기만 남기고 가 버렸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을 기다려도 올 생각을 안 한다.

이런 경험이 너무 속상해서 이곳 현지에서 만난 한국 분에게 사정 얘기를 했더니, 당일에 온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위로를 받았다.

그분 말에 의하면 다음 날 오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ㅠ.ㅠ


다시 또 부동산에 연락했다.

그랬더니 다시 또 기술자가 며칠 뒤에 방문할 테니 기다리라고 한다.

이번에 온 기술자도 당일 빈손으로 와서 하자가 발생한 곳만 보고 갔다.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다음 날 어제 방문한 기술자와는 다른 2명의 기술자가 방문해서 수리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오전만 작업하고 그냥 가 버렸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어?, 왜 하루 만에 끝날 일을 내일 또 한다고 하지?"


그리고 다음 날 다시 또 기술자 2명이 와서 작업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 집에 발생한 하자를 다 고친 것이 아니다.

보일러는 자기 담당이 아니라고 한다. ㅠ.ㅠ

  

천장에서 분리된 식탁 전등, 매일 밥을 먹을 때 언제 떨어질지 몰라서 불안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수리하는데 2개월 정도 걸린 것 같다. ㅠ.ㅠ


이렇게 집에 발생한 하자와의 전쟁은 입주 후 1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고 1년이 되어서야 겨우 해결되었다. 

(집에 발생한 하자 이야기는 따로 모아서 글을 올려야겠다. 너무 할 이야기가 많다. ㅠ.ㅠ)




어디 이것뿐이랴.

수많은 기다림과의 싸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속상함과 화병만 남았다.

스페인에서 우스개 소리로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걸리는 병이 '화병'이라고 한다. 


처음에 너무 황당한 일도 많았고 속상한 일도 많아서 고생이 많았다.

어느 날 문득 침대에 누워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아내가 혼자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다. 

웬만해서는 내 앞에서 힘들다는 내색을 안 하던 아내가 밤에 눈물 흘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많이 속상했다.


"여기 왜 왔을까? "


나도 많이 속상했고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조금만 참읍시다. 조만간 적응되겠지......" 




기다림의 문화.

1년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이제야 이곳 기다림 문화에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

그렇다고 아직 완전히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 사람들도 관공서의 시따와 기다림 문화를 코미디 소재로 사용하기도 하고 많은 불평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곳에 살아야 하는 이상 기다림 문화에 적응해야만 한다.

마음속 기대를 내려놓고 잊어버린 듯이 기다려야 한다. 

안 그러면 본인만 손해다.


- 04화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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