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경 Oct 21. 2023

익어간다는 것

  쳐다봤다고 노인을 폭행한 젊은이의 이야기로 귓전이 시끄럽다. 내 일 아니어도 속이 부글거린다. 나쁜 놈, 못된 놈, 세상에 어쩌면 그런 놈이…. 욕이라도 잔뜩 해주고 싶고 할 수 있다면 한 대 쥐어박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정작 그 앞에서는 몸이 오그라들겠지. 심란한 마음 탓인지 종일 온몸이 찌뿌듯하고 욱신거린다. 유리창에 구슬이 맺히더니 미끄러진다. 일기예보보다 신체 예보가 더 잘 맞는다. 늙었다는 증거다. 


  혼자 놀고 있는 라디오의 가락들이 낯설다. 날렵한 젊은이들처럼 달음질하는 가락에 채인다. 소파에 몸을 부리고 고양이처럼 웅크린다. 끝없이 가라앉을 것 같다.


  고주박잠이 들었던 걸까, 몸을 뒤척인다. 언제 바뀌었는지 노랫가락이 감미롭다. 귀를 쫑긋한다. 노랫말 따라 털이 올올이 서는 것 같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갑자기 귀가 뻥 뚫리는 것 같더니 괜히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이런 주책이라니. 처음 듣는 것도 아닌 대중가요 한 구절에 울컥해진다는 것, 이 또한 늙었다는 증거이리라. 그렇지만 왠지 쥐를 발견한 고양이처럼 날이 선다.


  창가에 서서 밖을 본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그리는 곡선이 보인다. 쓰다듬듯 어루만지듯 스며드는 빗줄기. 마른 가지가 들썩이는 것도 보이고 떨켜 속에 숨어있던 초록이 젖은 머리를 흔드는 것도 보인다. 봄이 오고 있구나! 유리창에 그려지는 뜻 모를 글자에도 괜히 맘이 설렌다. 그러나 비의 언어는 비밀스럽다. 해독하지 못하는 암호를 지우고 손가락으로 글씨를 쓴다. 익어가는 것이라고. 익어가는 것이라고. 그러다 털썩 소파에 주저앉는다. 정말 익어가는 것일까.


  익어간다는 것은 제 안에 품은 씨앗을 위해 제 몸을 누군가에게 내어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시고 쓰고 떫던 삶의 흔적을 시간의 이름으로 걸러 다디단 당분으로 만드는 것, 삶을 헤쳐나가며 단단해진 몸을 추억의 이름으로 풀어 곰삭은 맛을 품는 것, 햇살에 반짝이는 고운 빛깔로 화려한 유혹을 하는 것, 마침내 농익은 몸으로 누군가의 허기와 갈증을 달래고 더러는 지친 호흡까지도 가다듬어 주는 것, 그리하여 오롯한 씨앗 하나를 지켜내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익어가는가. 나는 아직 나를 다 내어줄 준비가 되지 않은, 깐깐하고 고집스러운 노인이 아닌가.


  과일들이 익어가는 모습을 돌이켜본다. 풋것일 때는 이파리 속에 몸을 숨겨도 좋을 만큼 푸르던 것들이 옹골차게 속을 채우고 나면 더러는 빨갛게 더러는 노랗게 단장한다. 식물의 열매들이 색을 입는 것은 유혹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제 몸을 팔아야 하는 자의 아우성이고, 제단에 제 몸을 올려놓은 무녀의 기원이라고 할까. 


  제 몸을 바치기 위해 속을 채우는 일은 담금질이다. 채워야 하는 것은 허공이고 갈무리해야 하는 것은 시간이다. 허공 한 움큼 베어내 작은 몸을 부풀리기 위해 뜨거운 햇살도, 천지가 아득해지는 뇌성도, 칼날 같은 비바람도 녹이고 품어야 한다. 그렇게 베어낸 허공 한 줌에 기다림이란 갈증으로 빚어낸 과즙. 온몸에서 단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채우고 채우지만 그러면서도 속 깊이 품은 씨앗을 위해 마지막 한 겹 시고 떫고 단단한 가림막은 끝내 풀지 않는 지혜로움까지 지니지 않았는가.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함. 그래서 ‘자연의 위대함’이란 언어는 진부하지 않다.


  내 안을 들여다본다. 자연의 위대함이란 끊임없이 노화해 가는 시간뿐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면서도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가끔 세 살 터울인 동생에게 농담인 듯 말한다.


   “지금부터 우린 어떤 이유로 죽어도 자연사란다.”


  처음엔 좀 떨떠름해하더니 요즘은 곧잘 맞장구친다.


  반세기 전만 해도 갑년을 맞으면 축하연을 떠들썩하게 열었다. 회갑은 장수의 다른 이름이었다. 지금은 회갑은커녕 고희도 조촐히 지나간다. 떡 벌어지게 회갑연을 열었던 사람들이 보면 우리가 지금 사는 시간은 모두 덤일 것이다. 덤으로 얻어진 수명이 모두 축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 덤을 거저 얻은 것은 아니다.


  국민소득 1,000달러가 목표이던 시절. 비바람이야 예삿일이고 천둥 번개는 얼마나 울었던가. 그 아래 맨몸을 드러내야 했던 사람들은 제 몸을 담금질하며 징검다리도 없는 시간의 강을 건넜다. 더러는 이역만리 탄광에서, 더러는 총알 비가 내리는 밀림에서 흘린 피땀으로 세월을 익혔다. 농익은 세월은 달콤하고 풍성한 열매가 되었다. 국민소득 삼만 달러.


  삼만 달러 시대에는 일상에서 그다지 아까운 것도 없고 특별하게 귀한 것도 없다. 배고프다는 것이 얼마나 절절한 아픔인지도 모른다. 젊은이들은 그런 삶에 길들어 있다. 예의와 도덕은 그들에게 편하게 맞춰져 가고, 지난 시간은 잊혀간다. 그들에게 이런 풍요를 가져다준 사람들은 푸대접받는 것 같고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다 보니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여 “요즘 젊은것들은”이라는 말로 끝날 때가 많다. 더구나 “노인 폭행”이나 “노인 푸대접”이 문제가 되면 젊은이 모두를 싸잡아 화를 낸다. 나도 젊은이들이 못마땅할 때가 많다. 더러는 젊은 모두가, 때론 내 앞의 자식들이 못마땅해서 너희들이 지금 누리고 사는 것이 누구 덕인 줄 아느냐고 분개하기도 한다. 왜 모든 젊은이에게 화가 나고 서운해지는 것일까.


  그들은 천 달러 시대를 알지 못한다. 겪어보지 못했으니 배고픔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걸 모른다는 것이 괘씸하다. 천 달러 시대의 피와 땀으로 이룬 성장의 열매를 거저먹는 것 같아 속상해서일까. 그건 아니다. 막막하던 시대를 살아낸 우린 무엇을 되받으려고 그 고된 나날을 지나온 것이 아니다. 그냥 내 안에 품은 내 새끼를 위해 버티고 견뎠다. 나처럼 배고프지 말라고. 나처럼 고생하지 말라고. 먹으라고, 그저 잘 먹기만 하라고, 햇볕과 모진 비바람을 보듬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투정을 부리다니.


  살아온 시간이 모질고 고단했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몫이었다. 지나온 시간을 안타까워하라고 시간을 덤으로 얹어준 것도 아니다. 누려보지 못한 젊음을 누리라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힘들더라도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시간이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은 우리를 익힌 것이고, 젊은이들의 시간 또한 그들을 익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마음이 마냥 편해지지는 않는다. 쳐다봤다고 어른을 때리다니. 정말 나쁜 놈이다. 아니지, 그런 나쁜 놈은 천 년 전에도 있었고 이천 년 전에도 있었고 소크라테스도 “요즘 젊은것들”을 나무라지 않았나. 혼자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달래다 탄식하고 만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흰 고무신이 댓돌 위에 놓인 것만으로도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던 옛 어른들이 생각난다. 온몸을 터지도록 과즙으로 채우면서도 마지막 단단한 가림막으로 씨앗을 감싸고 있는 과일들을 다시 생각한다. 외면할 수 없는 사실에 부딪힌다. 보듬기에만 정신 팔려 그 마지막 가림막을 허물어 버린 것이 우리인 것을. 보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어쩌면 우리가 누려보지 못한 한을 풀기라도 하듯 위태롭게 그들을 품어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가림막조차 없이 자란 젊음은 스스로 무너지며 물크러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쁜 놈을 향해 부라리던 눈길이 갈 곳을 잃는다. 그것마저 품어야 하는 우리의 씨앗인 것을…. 


  꽃은 떨어지며 열매를 탓하지 않고, 열매는 제 살을 내놓으며 씨앗을 탓하지 않는다. 나무는 빈 껍데기만 남아도 그 안에 산새가 깃들 보금자리 하나쯤은 내주지 않는가. 그루터기만 남아서도 기댐이 되는 나무. 그렇게 익어가는 것을 기대하지만 오늘 하루도 늙어만 간다.          

이전 07화 5월에 내린 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