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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경 Oct 22. 2023

5월에 내린 눈

  이팝나무에 꽃이 피면 함박눈이 내린 것 같다. 소복한 눈꽃은 여름 문턱에서 더위를 미리 식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올해는 그 하얀 꽃이 핀 문턱을 넘어서기가 왜 이리 조마조마할까. 


  동면에 든 양서류처럼 움츠린 지 어느새 백일이다. 서툰 동면 한 달 남짓인 때였다. 잎눈을 밀치며 새어 나오는 연둣빛에 유난히 가슴이 떨렸던 것은 겨울잠에 익숙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해마다 봄이 되면 지천으로 돋아나는 새순일 뿐인데, 그 연둣빛에 깨어나는 세상을 처음 맞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맘껏 탄성을 내지르지 못한 것은 무장한 마스크 탓만은 아니었다. 경칩의 출구가 혹한이었다.  


  갈색 줄기에는 하루가 다르게 연둣빛 물이 흘렀다. 연두는 지휘자다. 그 손끝이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숨어있던 물감들이 팡파르처럼 울렸다. 어느 순간 마른 가지에서 부리 노란 새가 울고, 또 어느 가지는 연분홍 나비를 날렸다. 그리고 마침내 터뜨린 찬란한 함성. 누가 일부러 찾아가지 않아도 저마다 제자리에서 축포를 터뜨리는 것은 꽃들의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 함성에도 문을 열지 못했다. 봄은 그냥 접혀진 채였다.


  들려오는 소식은 모두 불안하고 움츠린 일상은 음울했다. 아는 사람과 통화라도 하면 걱정거리가 앞서고 결국 “아프지 마라, 건강해라.”로 끝나게 되었다. 동생과 통화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너무 집에만 있지 마요.”

“응. 공원 산책하고 운동했다. 윗몸일으키기도 하고 후프도 하고.”

“그냥 산책만 하지 그래요. 누가 만진 건지도 모르는데.”

“손 소독제 담고 나왔어.”

“그래도 이것저것 만지는 건 좀…. 암튼 조심하세요.”


  고작 세 살 아래인 동생은 날 아주 노인네 취급한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 공원의 운동기구들이 왠지 위험해 보였다. 


  이런 일상에서 며느리가 보낸 쌍둥이 손자들의 사진이나 동영상은 윤활유였다. 어렵사리 만들어서 태어나 막 돌이 지난 쌍둥이 손자. 그 아이들을 키우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며느리가 틈틈이 보내는 사진을 보고 있자면 멈췄던 시계가 째깍거리고 방 안이 환해졌다. 어쩌다 사나흘 사진이 안 오면 남편이 보챘다. 애 둘 치다꺼리하며 매일 사진 찍고 그걸 보내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아느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그 핑계로 아들에게 전화했다. 


  “사진 안 온다고 아버지가 기다리신다. 에미 힘드니까 니가 시간 나면 좀 보내라.”

  “집에 오세요.”


  얼마나 애들이 보고 싶을지 뻔히 아는 거다. 금방 일어서서 시동을 걸고 싶지만 그냥 주저앉았다. 마트에도 가고 산책길에 운동기구도 만졌다. 어제 스쳐 간 사람은? 혹시 잘못 만졌던 것은? 무엇보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없었다. 그 예쁜 것들을 안고 볼을 부빌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문은 점점 굳게 닫히고 시간은 결박당했다. 


  코로나란 보이지 않는 손이 지구의 목을 움켜쥔 것 같았다. 시작부터 요란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은 그저 한 명이었다. 나흘이 지나서야 겨우 또 한 명, 문제가 된 31번까지는 무려 29일이나 걸렸다. 그러나 서른 남짓이 일천이 되는 데는 8일, 일천이 오천이 되는 데는 불과 6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무서운 것은 그들의 은신과 잠복이었다. 어느 게릴라가 그렇게 은밀하고 그렇게 폭발적일까. 친밀하거나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는 살수. 잠시 스쳐 간 어떤 사람이 치명적인 살수인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피습당한 다음이기 일쑤였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고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미지는 공포다. 공포는 서서히 늪이 되고 지구가 통째로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불확실한 희망은 공포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잠시 ‘국내 발병 0’이라는 희망에 들뜬 시간이 있었다. 5월의 신록과 함께 삼일 만세운동 같은 격렬한 인파가 도로를 메웠다. 탄산음료 병처럼 터트려지고 설렌 며칠. 그 잠깐의 설렘 후에 곤두박질친 희망. 그것은 발길에 밟혔던 봄풀처럼 짓이겨졌다. 그 속에서 바이러스는 강한 자들에게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은신만 하며 거쳐 가는 영악함까지도 보여주었다. 오월도 피지 못했다.


  ‘마이너스 유가’라는 단어를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그건 오랜 세월 쌓아 올린 견고한 탑들이 무너지는 굉음이었다. 파이는 다시 회복할 수 없게 조각났다고 했다. 그런데 겨우 10%라니. 절반 이하로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했다. 마음은 이미 절반도 넘게 죽어버린 것만 같은데.


  많은 사람이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원폭이나 수폭 같은 거대한 살의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틀린 것 같다. 그것은 은밀하지 않다. 숨 막힐 듯한 미지의 공포도 아니다. 사람과 사람을 불신으로 갈라놓고 마침내 자신마저 불신하는 벽을 만들지도 않는다. 확실한 죽음은 인간을 인간으로 죽게 하지 않을까. 


  BC와 AD가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바뀔 것이라는 말이 우스개가 아닌 현실로 다가온다. AC의 사람은 BC의 사람과는 다를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모습까지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그 모습은 추함이거나 막장의 동의어일 것이다. 


  그런데 AC로 가는 길목에서도 꽃은 더 곱게 핀다. 돌 틈에 민들레는 더 노랗고 벚꽃 함성은 더 반짝였다. ‘마이너스 유가’로 화석의 잿빛 가루가 숨을 고르고 황사조차 주춤했던가. 인파가 뜸한 도심의 공기마저 맑았다지. 오랜만에 맞는 쾌청한 봄. 사람들의 발길 잦아든 오솔길에 작은 풀꽃들이 더 소담하고, 나무들은 제 철을 아낌없이 누리며 꽃피고 있다. 그런데 어느 해보다 더 희고 탐스러운 이팝 꽃, 5월에 내린 눈, 그 아래서 난 한기를 느낀다. 여름은 아직 접힌 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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