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병과 영관급 보직을 관제특기 중위가…
제5공화국 출범 초기 ‘전두환 대통령 하명사업’인 새 군가 제작 때문에 국방부 본부로의 10개월 파견 명령을 받았던 제2회 MBC 대학가요제 출신 공군 소위. 1981년 2월부터 정훈국 파견 근무를 시작해 ‘전선을 간다’ 등의 새 군가 제작사업이 종료된 게 그해 7월이므로 나의 파견 목적은 중도에 이미 달성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해 11월 말이면 당초 근무지인 수원 제10전비(전투비행단)로 원대복귀를 해야 순리였다.
전국 공군 비행장마다 단 1명씩 배속된 항로관제 반장을 빼앗긴 제10전비 통신대대는 손실 인원의 정상복귀를 고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새 군가 제작의 청와대 보고 직후인 7월 중순 중위로 진급한 상태였던 나는 파견 종료를 앞두고 정훈국 문화홍보과에 정식으로 전속 발령됐다. 이렇게 해서 1984년 3월 전역할 때까지 총 3년 2개월간 국방부 본부에 근무하게 됐는데….
정훈병과 영관급 보직을 주특기도 전혀 다른 항로관제 중위가 이어받게 된 계기의 시발점은 육사 11기인 당시 정훈국장(육군 소장)에게 온 한 통의 영문 편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군가 제작사업이 본격화한 1981년 상반기 나는 군가 이외에도 문화홍보과 내의 이런저런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그즈음 국장에게 모종의 영문 편지(일종의 공문)가 왔는데, 과장을 비롯한 과원들이 번역을 타 부서 누구에게 부탁할까 고심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나섰다. “그 편지 제가 번역해드리겠습니다.” 비록 영어 전공자는 아니지만 대학교 영자신문 편집국장을 지냈고, 영어시험을 쳐 공군 장교로 입대했으며,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군 초급 관제사가 됐는데 편지 한 장쯤이야. 파견 초기엔 나를 기타 치며 놀다가 입대한 한량쯤으로만 여겼었는지, 이 ‘사건’을 계기로 신참에 대한 과원들의 시선이 180도 달라지고 있음을 난 짐짓 모르는 체하면서도 온몸으로 느끼며 즐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