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기 전에 은근히 다짐을 해 두었다. 해가 바뀌어도 또 보자는 인사를 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 또 봬요.”
“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년에 또 보자는 말은 해마다 끝나는 계약을 내년에도 계속해서 안전관리를 우리에게 맡겨 달라는 뜻이다. 이게 통했는지 양평에 군부대 네 곳에 1월 초에 방문하겠다는 말에 대표는 통화를 했노라고, 가도 된다고 답변을 했다. 다행이다. 내가 담당한 곳에는 그래도 떨어져 나간 곳이 없다.
작년 11월 말에 양평에 이례적이 폭설이 내려서 공병부대에 단전이 됐을 때도 적절히 대응을 했다. 공사 중인 숙소 건물에 전선을 방치해서 발생한 파워퓨즈 용단(溶斷)에는 누전 책크를 제대로 했고, MOF(Metering Out Fit, 전력수급용 계기용 변류기) 고장도 밝혀내 교체했고, ASS(Auto Section Switch, 자동고장구분개폐기)도 수리하게 했다. 이런 과정에서 두 번이나 비상 출동을 해서 대처를 했다. 단 한 가지 옥에 티가 있었다면, MOF가 고장이 났을 때 수변전실 판넬 문을 닫지 않고 철수한 것이었다.
“안전관리자님, 왜 판넬 문을 열어 놓고 가셨습니까?”
“아, 내가 그랬어요? 야, 이거, 두 번이나 비상출동을 해서 문제를 해결하고도, 문을 안 닫은 것 때문에 좋은 소리 못 듣네. 미안 합니다. 내가 깜박했어요.”
결전아파트에서 정전이 되었을 때는 휴일근무자에게 전화로 안내를 해서 다시 복구 시킨 적이 있다. 다음 점검 때 가서 ACB를 Reset해서 ‘시스템 정상’을 확인 시켜 주었다. 궁금해 하는 ‘R/L’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는 것은 점검기록표에 이렇게 써 주었었다.
“R/L은 Remote/Local의 원격조정/현장조정의 의미로, 본 수배전실에서는 현장조정하고 있습니다.”
새해가 되어서도 이상 없이 방문을 해서 월 2회 점검 중에 1회를 마쳤다. 연말연초를 끊기지 않고 무사히 이어갔으니, 올해 점검은 계속하게 된 모양이다.
관공서의 시설이라면 여주시청에서 관리하는 공원에 화장실을 점검하는 것이 남았다. 이것도 별 말이 없기에 당연히 점검을 해도 되는 것으로 알았다. 8군데의 공원 화장실이다. 모두 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저쪽에 있는 강변공원 내에 있는 화장실이다. 아니다. 강천지구화장실만은 여의도처럼 하중도(河中島)에 있는 화장실이다. 월 중에 점검을 해 뒀다가 월말에 시청 공무원에게 한꺼번에 가져가서 싸인을 받고 한 장씩 넘겨주면 된다.
시청의 화장실이라고 하루에 한꺼번에 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 여덟 개의 화장실을 돌려면 한 달이 다 걸린다. 지역에 따라서 모둠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북쪽에 있는 전북지구화장실은 양평을 갈 때 들러서 점검하고, 비교적 시내에 있는 화장실은 시내를 오가면서 들러 점검을 하고, 가장 아래에 있는 강천지구 화장실은 제이타우젠트를 갈 때 들러서 점검을 한다. 가장 늦은 곳이 월말에 일정이 잡혀 있는 강천지구였다. 제이타우젠트와 덕진태양광의 일정이 대개 월말로 잡혀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달은 좀 달랐다. 제이타우젠트가 중순에 정기검사가 있었다. 여기를 미리 갔다 오느라고 중순이 되기 전에 거기에 함께 딸린 지역을 다 돌고 왔다. 강천지구화장실도 모두 돌았다. 시청에서 관할하는 화장실을 모두 돌은 셈이다. 이제 월말에 담당공무원에게 가져다주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이변이 났다. 대표가 전기안전관리 팀으로 오더니, 시청 화장실 담당자를 찾는다.
“예, 내가 했어요. 이번 달 점검을 모두 마쳤는데요. 미리 오랍니까?”
“아니요, 거기 잘렸습니다. 이번 달부터는 안 해도 됩니다.”
“예? 부지런 떠느라고 이번 달 거 벌써 다 했는데요....”
“거기 파일을 전부 주시지요. 정리해야 합니다.”
파일을 받아가는 대표의 표정이 좋지 않다.
새해가 되었다 해도 우리는 시무식도 하지 않았다. 대표가 며칠을 나오지 않아서다. 대표가 나타난 것은 새해 둘째 주였다. 작년 말부터 얼굴을 보이지 않더니, 한 열흘 만에 보는 얼굴이다. 작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연말을 앞두고 퇴근시간이었다. 얼굴이 벌게서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우리는 벌써 안다. 대표가 저럴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안다. 대표가 혀 꼬부라진 말을 몇 마디 하더니, 소방팀에 한 사람을 데리고 나간다. 소방팀에 있는 사장 딸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누군가 물었다.
“왜? 이번에는 왜 그래?”
“관급수용가가 모두 잘렸데요.”
딸도 속이 상한지 더 이상 말이 없다. 아버지가 저렇게 괴로워하는 이유를 이해한다는 듯하다.
이 회사에서 10년을 일했다는 팀장이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덧붙여 설명을 한다.
“여주에 안전관리를 하는 회사가 대여섯 개 되는데, 그 중에 한 회사가 시청 공무원을 하다가 퇴직한 사람이 차린 것이 있어. 이번에 모든 관급점검이 그 사람에게도 다 넘어갔어.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지 뭐.”
“아, 그래도 그렇지, 몰빵으로 다 줄 수가 있나? 그리고 뭔 이유가 있어야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명분이 될 거 아니야.”
설왕설래, 모두 자기 의견을 내느라고 야단이다. 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다행히 내가 맡은 관급점검에는 누구도 말이 없었다. 여주도서관을 맡고 있는 이과장이 자기 이야기를 한다.
“이유야 간단하지. 나한테는 그러더라고. 여태까지 지에스에서 점검 했는데, 한 군데서 너무 오래 하면 안 된다고, 이번에는 다른 업체에 맡겨야겠다고 하더라고. 그러는데 뭐라고 토를 달어.”
금방 이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국회의장이 의사봉 두드리듯이, 이 과장에게 전화가 온다. 끊더니,
“이 봐라. 여주도서관에서 금방 전화가 왔다 아이가. 다음 달부터는 점검을 오지 말란다. 재계약 안 했다고....”
나한테는 시청 하천과 직원이 아무 말 없었다. 지난 월말에 찾아가 12월 점검표를 싸인 할 때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나도 굳이 묻지 않았다. 긁어 부스럼 낼 일이 없어서다. 가만있으면 계속 가는 것이지, 끝을 상기시켜봐야 좋을 것이 없지 않나 싶었다. 그러지 않는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세요’를 아무리 외쳐도, 외치지도 않고 이 문구를 생각만해도, 코끼리가 계속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공무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관급점검의 재계약은 6개월마다 한 번씩 이루어지는데, 그때마다 점검을 마치고 점검비 청구서와 함께 6개월 치의 점검기록표를 다시 복사를 해서 가져다주어야 했다. 매월 8장의 점검표에 싸인을 하고, 그 중에 한 장을 전해주고 왔는데, 월말에는 같은 걸 다시 복사를 해 오라니, 이게 도대체 뭔가 말이다. 전기안전관리법에 의하면 점검기록표는 4년간 보관해야한다. 이 공무원이 받은 점검기록표도 마찬가지다. 다달이 싸인한 서류를 보관하지도 않고 번번이 버렸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직무유기다. 있는데도 나한테 다시 복사를 해 오라는 건가? 그렇다면 예하 기관에 대한 갑질이다. 거기다가 물자절약도 할 줄 모른단 말인가? 40장이나 되는 점검기록표를 생으로 다시 복사를 해 오라는 말이다. 나한테 뿐만 아니다. 6개월 치를 8장씩 복사를 해 오란다고 했더니, 이과장이 방법을 가르쳐 준다.
“공무원들 다 그래요. 그렇게 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줄게요. 여기서 파일을 하나 만들어서, ‘전기점검기록표’라고 표제를 붙여 가서, 책꽂이에 꽂아 줘요. 싸인을 받으러 가잖아요? 싸인 한 걸 내가 거기다가 철해 줘야 해요. 그러면 6개월 후에 또 복사해 달라고 안 해요.”
조부장과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감사원 감사청구를 하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감사원감사청구를 했다가는 회사가 시청에 찍혀서 여주에서 다시는 관급점검을 맡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12월말에 싸인하는 것도 12월치 이전 5개월분 기록표를 전부 복사를 해서 대봉투에 담아다 주었다. 혹시라도 딴지를 걸었다가는 화장실 하나라도 날아갈까 싶어서 몸을 사렸다. 그럼에도 우리 회사에는 관급수용가 점검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모두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 나는 조심하느라고 ‘코끼리’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정말 코끼리가 나타났는지, 내가 점검하는 화장실을 모두 가져가고 말았다. 수용가 여러 개를 한꺼번에 빼앗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대표는 지난 연말에 술을 마시고 새해가 될 때까지 한 열흘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우리가 볼 수가 없어서 그렇지, 계약 건 하나를 따내기 위해서 대표는 무슨 일이건 다 하는 모양이다. 안 봐도 알 수 있다. 대표는 계약을 따낼 수만 있다면 가격은 얼마든지 낮추는 것은 물론, 그 보다 더 한 일도 한단다. 그래서 우리 회사의 사훈이 불광불급(不狂不及)이다. 대표의 의중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훈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狂)지 않고서는 미칠(及) 수가 없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미친 듯이 몰두해야 한다는 뜻이다. 마치 태조가 조선을 건국할 때 모든 것을 쏟아 부었듯이 말이다. 조선의 왕들은 묘호(廟號)라는 것이 있다. 죽고 나서 종묘에 모실 때 붙이는 이름이다. 흔히 우리가 조선의 왕을 부르는 이름이 묘호다. 여기는 끝에 ‘조’로 끝나는 왕이 있고, ‘종’으로 끝나는 왕이 있다. 태조, 영조, 정조 같이 묘호가 ‘조’로 끝나는 왕은 창업군주나, 중흥군주, 혹은 큰 국난을 극복한 군주였음을 뜻한다. 태종, 세종 등 ‘종’으로 끝나는 왕은 수성군주(守城君主)다. 선왕의 치적을 이어서,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문물을 융성하게 한 왕을 뜻한다.
여기서 문제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을 외치는 왕이 있었다면 ‘조’로 끝나는 왕이었겠는가, ‘종’으로 불리는 왕이었겠는가? ‘종’보다는 ‘조’에 가까울 것이다. 창업이나 큰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고 외쳤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회사는 아직도 설립 초기에 물불 가지지 않고 세를 확장할 때의 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회사가 설립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설립초기의 전쟁 중이거나, 큰 국난을 맞아 극복 중이다.
대표가 흔히 써먹는 극단적인 방법은 점검비를 낮추는 것이다. 제 살을 깎는 방법이다. 한전에서 전기를 받는 kw당 점검비용이 정해져있다. 그걸 깎아서 제시한다. 가령 월 10만원인 걸 8만원으로 제시해서 계약을 성사시키는 것이다. 뭐, 꿩 잡는 게 매라고, 아주 계약을 하지 못하는 것보다 좀 적게 받더라도 계약을 성사시켜는 것이 백번 낫다. 하나라도 더 계약을 해서 메우는 방법도 있으니까, 점검비를 깎더라도 우선 계약을 따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 덕분에 우리의 일이 많은 것은 안고 가야하는 숙명이 되었다.
관공서에서 받는 점검은 수의계약이 아니라 경쟁계약이라면 가격을 낮춘다면 유리했다. 그것도 많이 깎을 필요가 없이 경쟁상대 중에서 조금만 낮아도 입찰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이번에는 가격에 관계없이 안면을 보고하는 계약이라서 대표가 가격을 낮춘다고 해서 통할 일이 아니었다. 관공서는 제 돈 주는 것이 아니니까, 가격을 낮추지 않는다고 해도 별로 영향이 없다. 전관예우 차원에서 이번 계약이 이루어진다니 대표는 손 쓸 방법이 없어졌다. 이것이 6개월을 가고, 앞으로도 계속 된다면, 손 놓고 잃을 계약이 얼마란 말인가? 여기에 속이 상했던 것이다. 이것을 달랠 방법은 술밖에 없었고, 술을 마시고 꼭지가 돌아 골아 떨어지니 몇날며칠을 직원들조차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조부장이 한번은 수용가를 방문해서 다툼이 일어났단다. 다짜고짜 반말을 하더란다.
“아니, 왜 그전 사람은 지적을 안 하고 잘 넘어갔는데, 이거 잘못됐다, 저거 잘못됐다, 지적을 하느냐고...?”
“지적을 하는 거야 제 임무입니다. 잘 못된 전기설비를 알려 드려야 수용가에서도 고치실 것 아닙니까?”
“알았으니까, 지적 질을 하지 말라고. 지적 질을....”
조부장 말로는 지적을 못하게 하는 거야 듣기 싫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말끝마다 반말을 하는 것이 더 기분이 나쁘더란다. 그래서 기왕 자기의 잘못은 없다 싶어서 자기도 막 나갔단다.
“그런데 왜 반말을 하십니까? 날 언제 봤다고....”
“뭐? 너희 사장한테도 내가 반말을 하는데, 그 종업원한테는 반말을 못하냐?”
“대표는 대표고, 나는 나지. 대표한테 반발을 한다고, 나한테도 반발을 해?”
“너희 사장은 나한테 무릎도 꿇었어. 그의 여편네하고 같이.... 왜 이래....”
“뭐라고...?”
조부장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났단다.
이 대목에서 조부장이 그 상황을 유추해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사장과 그 부인이 가서 무릎을 꿇었을까 하는 것이다.
“부장님, 회사에서 일 때문에 사고가 났다거나, 안전관리를 잘 못해서 사과를 해야 했다면 무릎까지 꿇을 일이 있었을까요? 그런 건 기술로 해결해 주면 됐을 것입니다. 계약 건이 아니면 뭐였겠어요. 점검 계약을 다른 업체로 바꾼다니까 무릎 꿇은 거 아니었겠어요? 계약만 따 낼 수 있다면 무릎이라도 꿇고, 마누라도 데리고 가서 무릎을 꿇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잖아요. 미친 짓이라도 한다는 말이 그 말 아니겠어요?”
뭐, 지금으로야 우리가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이제는 사훈을 ‘가족경영’이라느니, 세종의 통치이념인 ‘이민위본(利民爲本)’ 같은 사훈, 즉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라는 사훈을 내 걸 법한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회사가 20년 쯤 됐으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아직도 우크라이나와 소련은 전쟁 중이 듯이.... 북한도 소련에 군대를 파병해서 전쟁이 끼어들었다. 우리도 원조물자를 보내면서 일찌감치 우크라이나 소련 전쟁에 개입해 왔다. 윤석열 대통령도 공수처가 주도하는 공보수사본부에 의해 구속이 확정되어 수의를 입고 있다. 지지자들을 등에 없고 전쟁 중이다. 총을 쏘고, 구속을 시키고 해서만이 전쟁이 아니다. 우리는 자유롭지만 여전히 전쟁 중이다. 회사가 수용가를 빼앗느냐 빼앗기느냐 전쟁 중이다. 올해 우리는 관급점검을 모두 잃었다. 대표는 술을 마시고 잠적한지 열흘 만에 환골탈태해서 다시 얼굴을 보였다. 우리는 올해 전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천 여주 허허벌판에는 눈보라가 악보처럼 옆으로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