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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흉터가 두렵다면

2025/3/15 낭독

by 독자J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내 유년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그리고 누구든 자신이 되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우리들 운명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線)은 아무도 보지 못한 이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칼자국과 균열은 다시 늘어난다. 그것들은 치료되고 잊히지만 가장 비밀스러운 방 안에서 살아 있으며 계속 피흘린다.
(『데미안』, 민음사, p.26)

우리는 하얗고 보송보송한, 솜털 가득한 아기로 태어난다. 처음에 세상은 그저 신나는 놀이터이고, 부모님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슈퍼맨과 원더우먼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재밌게 놀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근심 걱정 없이 산다. 그러다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은 놀이터가 아니라 전쟁터이고, 부모님은 슈퍼맨과 원더우먼은커녕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매일 전쟁을 치르고 상처 가득한 몸과 마음으로 나를 키웠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우리도 점차 수많은 경험과 좌절을 통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주인공은 이 대목에서 처음으로 자신보다 마냥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깨지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이 경험은 이 책을 쓰는 시점의 헤르만 헤세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이런 식으로 성장하고 변화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개성과 가치관, 즉 선(線)을 지니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결’이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와는 다른 인격체이며, 종국에는 부모를 극복해야 한다. 마치 작가가 아버지라는 기둥에 칼자국을 냄으로써 아버지라는 존재와는 다른 선과 결을 지니게 되는 것처럼. 작가가 말했듯, 한 사람의 삶은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며, 그렇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의미를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p.9)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기둥에 저마다의 모양을 지닌 칼자국과 균열을 내며 살아간다. 부모도 부모가 되기 전에 그랬다. 인생을 칼자국과 균열 없이, 깨끗한 기둥으로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런 균열과 상처가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오히려 그건 성장의 증거이다. 나만의 결, 나만의 멋을 지니는 과정이다.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여 나 자신을 꽁꽁 싸맸는데 그 대가는 무엇이었나? 결국 진물과 미처 다 벗지 못한 허물과 부패한 점액과 깨지 못한 알 껍질이었다. 나만의 길을 내자. 나만의 지도를 그리자. 나만의 선과 결을 지니자. 그리고 내가 부모가 된다면 자식에게 열심히 자신만의 선을 가지도록 독려하자. 그것이 인생임을 가르치자. 절대로 알 껍질과 점액을 제거하지 못한 채 살도록 하지 말자. 내가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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