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지침서, 『사랑의 기술』
p.5~25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사랑은 배워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프롬은 단호하게 말한다. 사랑은 기술이며, 배워야 한다고. 사랑의 조건에 대해, 프롬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능동적으로 자신의 퍼스낼리티(personality)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는 한, 또한 참된 겸손, 용기, 신념, 훈련이 없는 한, 개인적인 사랑도 성공할 수 없다. (p.5)
우리는 사랑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저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프롬은,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퍼스낼리티(personality) 즉 인성을 전체적으로 발달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즉, 본인이 먼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매력을 성적(性的) 매력과 동치 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프롬은 더 넓은 의미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타인과의 에로스(Eros; 성적 사랑)적 사랑을 위해서는 아가페(agapē; 자기희생을 동반한, 무조건적 사랑)적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프롬이 생각하는 사랑은 단순히 서로 만나서 좋아하기만 하는 것을 넘어선다. 외모나 재력과 같은 사회적 가치나 성적 요소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왜 사랑을 쉽다고 믿는 오류를 범하는가? 그에 대해 프롬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한다. 첫째, 사랑의 문제가,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받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는 외모, 재력, 지위 등 성적 요소와 사회적 가치를 가지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여자는 외모를 아름답게 가꿔 성적 매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쓴다. 이에 더해 매력적인 화술, 공손하고 온화한 태도, 밝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연기하기도 한다. 마치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사교 모임에서 환영받기 위해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모두 수동적 사랑을 위한 방법이다.
둘째, 사랑이, 사랑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에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그 사람이 사랑할 만하면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프롬은 이러한 관념을, 현대 사회의 중요한 특징인 물질주의적 교환 관계와 결부시킨다. 마치 진열장에 놓인 아름다운 상품을 고르는 것처럼 사랑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가 아름다운 상품을 고르듯 남도 똑같이 할 것이고, 상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때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본인들을 얼마나 아름답게 포장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일명 ‘끼리끼리 만난다’는, 본인들의 능력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지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과 집안의 급을 따지고, 본인보다 낫거나 못한 사람과는 관계를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시장주의와 물질 지향적 가치관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프롬은 설명한다. 이미 우리는 이런 경우에 꽤 익숙하다. 연예인 A와 B가 사귄다고 할 때, 자신도 모르게 누가 더 나은지, 못한 지를 따지게 되는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교환 가치라는 것이 우리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는 방증이다.
셋째, 사랑의 시작과 사랑의 지속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즉, 사랑을 시작하는 것과 그것을 지속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데, 사람들은 일단 시작하면 지속은 쉬울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까지 ‘골인’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적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랑의 시작이 주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 쾌락, 즉 상호 합일된 순간이 주는 만족감에는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을. 콩깍지는 벗겨지고, 상대방의 장점이 단점으로 바뀌며, 권태감이 찾아오다가 이별을 맞이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랑임을. 결혼 생활을 오래 유지하려면 서로 긴장하며 노력해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감정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고, 감정의 꽃길을 지나고 나면 현실의 파고를 넘어야 하는 순간도 온다. 그러면서 관계가 계속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다. 파고를 같이 넘다 보면 어느덧 내 상대방이 ‘동지’, ‘전우’가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초반의 달콤함은 덜해지지만, 더 깊어지고, 진해진다. 마치 곰국 같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 파고를 넘지 못하고 끝내 파경에 이르는 관계들도 많다. 왜냐하면 감정의 콩깍지가 벗겨진 이후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프롬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p.17)
한 마디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것은 없다. 불같은 사랑도 없다. 그저 불장난이 있을 뿐이다. 기간의 문제일 뿐, 달콤함은 언젠가 사라진다. 그리고 쓴맛이 기다리고 있다. 관계도 인생과 마찬가지이다.
사랑에 대해 이토록 오해하고 쉽게 생각함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여전히 갈망한다. 진정한 사랑을 원한다. 사랑받고 싶어 하고, 사랑하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롬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배우려고 하지 않으며, 우리가 성공하기 위해 온갖 기술을 익히는 것처럼, 사랑을 원한다면 사랑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고 말한다. 이론을 배우고, 실천하여 내 것으로 만들며, 궁극적으로는 사랑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 자체에 큰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