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발악한다'.
p.25~32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사람들이 사랑을 하고자 하는 이유로 프롬은 분리 불안을 꼽는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갖고 있으며, 그 이성으로 자신의 실존의 한계를 인지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이 유한하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며, 자신은 자연과 우주 앞에 한없이 작고 무력하다. 따라서 자신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라는 자각을 하게 되며, 이로 인한 불안과 자괴감을 극복하기 위해 외부 세계 또는 타인과의 결합을 적극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인식은 자신의 나약하고 무력한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리에 대한 공포를 프롬은 아담과 이브 이야기로 설명한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는, 프롬의 관점에서 보면, 아담과 이브라는 세계 최초의 인간이, 자신들의 동물적 상태를 ‘자각’했다는 것이 수치심과 죄책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각’이라는 현상이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것이며, 자신들의 본래의 상태 즉, 자신을 가릴 옷조차 없어 자신을 무력하게 야생에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이 인간의 고독과 불안함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프롬은 이 이야기를 단순한 성기(性器)와 신체 노출에 대한 꺼림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프롬은 아담과 이브가 자신들의 상태를 파악한데 이어, 상대방이 있고, 그 상대방과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됐지만, 아직 서로 결합할 수 있다는 것과 그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치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만일 태초의 두 남녀가 서로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완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상대방 앞에서 나체를 보여주는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건 신뢰의 증표이자 또 다른 흥분의 요소이지 않은가? 여기서 프롬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통해, 고독과 분리에 대한 불안이 수치심과 죄책감을 야기할 수 있음을 설명하며, 그 본질적인 이유는 인간이 자신에 대해 자각할 수 있는 힘인 이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분리와 고독에 대한 인간의 ‘광적인’ 두려움은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누군가는 동물이나 우상을 숭배하고, 인간을 제물로 바치며, 정복 사업을 벌이고, 사치와 향락에 탐닉하며, 아예 금욕주의로 살기도 하고, 혹독한 노동을 강요하기도 하며, 창조 행위에 몰두하고, 신 또는 형이상학적 대상에 의존하며, 타인과의 사랑을 갈망하기도 한다. 이러한 광적인 공포심을, 프롬은 인간의 발달 단계와 문명의 발달 단계를 연계하여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유아기의 인간은 어머니의 존재와 어머니와의 접촉만으로 고독을 해소할 수 있으며, 유아기의 문명 역시 어머니 자연(Mother Nature)과의 합일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 결함인 본질적 고독을 해소했다고 말한다. 원시 부족 사회의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들만의 낙원에서 분리되면서 그들만의 자각이 생기고, 그로 인해 역사가 시작되었듯, 인간도 점차 성장함에 따라 모성만으로는 본질적인 고독을 극복할 수가 없게 되어, 다른 수단을 찾기 시작하며, 문명 역시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자연과 유리되어 자신들만의 수단을 찾아 나간다.
여기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황홀경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원시 사회에서는 집단 광희(狂喜)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집단 성교(性交)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이러한 집단 광희의 경험은 공동체와의 합일을 통해 일시적으로 개인의 고독을 잊게 만든다. 집단 성교가 정당화되는 원시적인 문화에서는 비교적 이런 현상이 쉽게 일어날 수 있지만, 발전된 문명에서는 이런 일이 금기시된다. 그러므로 이런 문화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이 택하는 것은 알코올, 마약이다. 대개 이런 것들은 불법인 경우가 많으므로, 이런 것들로 도피하는 것은 죄책감과 후회를 유발하지만, 본질적 고통을 이기기 어려운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욱 자주, 더욱 강하게 이런 것들에 의존한다. 쾌락적 성교는 알코올과 마약에 비하면 비교적 합법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으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한순간을 제외하고는, 두 인간 사이의 간격을 좁혀주지 못하기 때문이다.”(p.29) 가벼운 관계가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인간은 존재론적 고독을 해소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번민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이 프롬의 생각이다. 프롬은 이러한 쾌락적 합일의 특징을 세 가지로 꼽는데, 첫째, 매우 강렬하고 심지어 난폭하다는 것, 둘째, 몸과 마음에 퍼진다는 것, 셋째, 일시적이면서 주기적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마약, 알코올, 쾌락적 성행위의 특징과 맞닿는다.
프롬에 따르면, 사람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쾌락적 합일보다는 집단적 합일을 추구했다. 즉, 개인적으로 고독을 해소하기보다 관습이나 신앙 등 집단적으로 약속된 것에 동화되는 것을 더 편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남들과 다른 생각, 삶의 방식을 갖고 있지 않고, ‘옳다고 인정된’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더 편하게 여겼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쾌락적 합일은 대상의 응답을 요하는데, 그 응답이 충분치 않을 때는 집단과의 결합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는 이러한 개인들의 특성을 이용하기 위해 위협과 공포(독재사회)를 사용하기도 하고, 선전과 암시(민주사회)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집단적 합일에 대한 욕구는, 자발적이라고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무의식 내에서 자연스럽게 강요되는 것이다. 그는 현대인들이 사소한 차이 정도에 만족하며 ‘나름대로’ 개성을 추구하고 산다고 믿을 뿐이라고 했다. 즉, 남들과 같아지고 싶어 하지만 약간의 차이를 두면서 남들과 다르다고 믿으며 산다는 것이다. 프롬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치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구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사람들 대부분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만인과의 의견 일치는 ‘자신의’ 견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직은 어느 정도 개성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 있어서 이러한 욕구는 사소한 차이에 의해 만족된다. 곧 핸드백이나 스웨터에 새겨놓은 머리글자, 은행 출납계원의 명찰, 공화당에 반대하고 민주당에 가입하는 것 등은 개인적 차이의 표현이 된다. 사실상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경우에 ‘이것은 다르다’는 슬로건을 떠들어대는 것은 차이를 추구하는 애처로운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 (p.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