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03일] 꼭 제주여야 하는
큰아이를 임신하고 입덧이 한창이던 15년 전 겨울, 시부모님이랑 제주로 여행을 왔었다.
소소한 추억이 많았던 그 여행이 너무 좋았다 말씀하시던 시엄마, 시아빠.
시간이 지나며 두 분 다 거동이 불편해지시고,
"조금 건강해지면 다시 가요, 꼭 다시 가요..." 하다가 시아빠는 먼 여행을 혼자 떠나버리셨다.
시엄마도 휠체어가 아니면 어디 다닐 수도 없는 상황이다.
주말마다 드라이브라도 다니며 바깥 활동을 하려 하는데 코로나는 정말 너무 힘든 복병이다.
작년 겨울,
제주를 이야기하다가 지난 후회를 번복하지 않고 싶은 다짐과 체코살이에 대한 미련에 두 번째 제주살이를 준비하게 되었다.
엄마는 여행 계획을 듣자마자 아파트 계단운동을 시작하셨다.
첫날 계단 손잡이를 잡고 2층까지 오르고서도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매일매일 조금씩 도전한 결과 한 달이 되기 전에 15층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셨다.
여행이 동기부여가 되어 운동도 하게 되는 효과.
이미 이상하고 묘한 제주효과는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 내려오기 며칠 전부터 확진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내려오는 날부터는 제주도도 3단계 거리 두기에 들어갔고 나는 또 걱정과 고민을 했다.
많은 고민 끝에.
제주살이가 시작 됐다.
이번 목표는 특별하지 않다.
요양병원 일 년에 아파트에서 일 년 동안 반강제로 요양생활을 하신 시엄마의 힐링과 일 년 넘게 아파트에 갇혀 온라인수업과 등교수업에 힘들어했던 아이들의 힐링.
어차피 코로나 때문에 외부 활동은 많이 못할 거고 책 많이 읽고 동네 산책하고 맛있는 거 많이 먹기.
낮에는 너무 덥기도 하고 사람들도 많을 것 같아서 밥 하기 전에 아들들 데리고 세화해변까지 드라이브도 하고 물에 발도 담궈보고 왔다.
아침엔 구름이 잔뜩이었는데 밥 먹고 빨래 널려고 보니 햇빛이 장난 아니다.
덕분에 빨래는 금방 다 말랐다.
그사이 주인아저씨는 수목소독에 해물파전까지 주고 가셨다.
드디어 남편이 시엄마를 모시고 내려왔다.
장애가 있는 직계가족으로 방역지침에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정말 조심하고 조심해서 지내시다 갈 계획이다.
일단 하나로 마트에 들러 회랑 매운탕거리를 사 와서 집에서 간단한 듯 거하게 저녁을 먹었다.
사진엔 없지만 제주닭강정이랑 땅콩막걸리가 더해졌다.
설거지는 상균이 몫이다.
대형고무장갑에 속장갑까지 끼워주고 나랑 신랑은 밤산책을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횡단보도에서 자꾸 콩가루 냄새가 났다.
근처 어디에 방앗간이 있는 건 아닐까... 했는데 진짜 방앗간이다!!
혹시 미숫가루도 파시냐 물었더니 기다리신 듯 미숫가루 맛자랑을 하신다.
그래서 따끈한 미숫가루를 1kg에 6천 원에 득템 했다.
내일 얼음 동동 띄워 맛있게 타먹어야겠다.
집에 도착하니 상균이가 설거지를 멋지게 해 놨다.
잘 씻은 건지는 알 수 없으나 가르쳐준 대로 정리는 진짜 잘해놨다.
가르친 보람이 있다.
내일 요리 하나 가르쳐줘야겠다.
제주에서 만난 모든 분들은 너무 친절하고 좋다.
아이들 끝말잇기에 힌트 주시던 택시기사님도,
잃어버린 도서대출증 다시 발급해 주시던 도서관 사서님도,
우리집 주인아저씨도.
내일은 또 어떤 제주효과가 있을지,
어떤 친절한 누군가를 만나게 될지,
기대하며 오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