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26일] 비 오는 날의 전시회 '빛의 벙커'
여행에는 타이밍이 있다고 한다.
누구에게는 정말 환상적이었던 곳도 그날의 분위기와 기분에 따라 그 환상적인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한다.
누구나 좋다고 말하는 그곳도 누구나 다 좋아할 수는 없다.
내 여행의 타이밍은 지금이 맞다.
주변에 보이는 환상적인 뷰와 새로운 설렘 때문만은 아니다.
언젠가 한 번씩 느꼈었던 엄마와의 교감.
좋은 걸 좋다고 충분히 말해 주시는 오늘.
행복한걸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해 주시는 오늘.
고마운걸 충분히 고맙다고 말해 주시는 오늘.
'우리 딸 사랑한다' 말해 주시는 오늘.
우리 엄마의 여행의 타이밍도 '지금' 이길 바란다.
어제저녁 처음으로 온 방에 에어컨을 끄고 잤다.
서늘한 기운마저 느껴져서 잠깐 보일러도 돌렸다.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어제 장 보며 곰국을 사 왔는데 오늘 아침 아주 고마운 한 끼가 되었다.
국만 먹기 서운해서 엄마께 정말 큰 콘치즈를 구경시켜 드렸다.
아침 간식까지 챙겨 먹고 엄마 손가락 소독을 위해 구좌보건지소에 먼저 들렀다.
다음 주면 실밥을 빼니까 이번이 마지막 소독이다.
점심은 성산에 가기 전 고기국숫집 '호로록'이다.
고기국수가 유명하지만 석균이만 고기비빔국수를 주문하고 우리는 멸치국수를 주문했다.
여기 비빔국수 내 취향이다.
돔베고기랑도 너무 잘 어울린다.
김밥은 1인 1 메뉴 시킬 때만 주문 가능하다.
우린 국수 4개 시켰으니까 가볍게 두 줄만 시켰다.
계란말이를 크게 말아서 몇 등분해서 넣어 주는데 생각보다 사이즈가 크다.
멸치국수는 육수가 좀 부족하고 엄마는 면이 붇어서 식감이 좀 떨어진다 하셨다.
하지만 나는 '호로록'이랑 잘 어울리는 면발이라 생각했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빛의 벙커 모네, 르누아르.. 샤갈 지중해 화가들' 전이다.
비 오는 날이라 사람이 많을 줄은 알지만 엄마의 제주도 마지막날 이 전시를 함께 보고 싶었다.
나는 서울에서 고흐전을 본 적이 있는데 음향이나 스케일은 이번 느낌이 더 좋았다.
다만 사람들의 진행 방향이 전시를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라 어수선한 건 아쉬웠다.
별도의 공간으로 몇몇 화가들을 나누어 같이 전시를 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이 클림트, 고흐에 이은 세 번째 전시이니 다음에는 더 보완되기를 기대한다.
엄마도 균스형제도 이런 식의 전시는 처음이라 눈과 귀가 호강했다.
어디 가서 사진 찍는 스타일은 아니신 엄마도 여기저기 특히 내 모습도 찍어주시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새로운 경험도 하고 가서 너무 좋다고 말해 주시는 엄마.
그 말씀에 오늘 하루도 그냥 너무 좋다.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는 게 느껴져서 길게 있을 수가 없었다.
1시간 반 정도 한쪽 구석 의자에 앉아 감상하고 주변을 돌아 나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엄마, 제주에서 드셨던 것 중에 뭐가 제일 맛있었어요?"
라고 묻자 망설임 없이 대답하신다.
"해장국!"
아침 일찍부터 아부오름에 오르고 아마 시장하셨던 탓에 더 맛있게 드신건 아닌지.
내일 아침 비행기로 돌아가시기 때문에 동서네 해장국에 들러 소머리해장국 3인분 포장해 왔다.
제일 맛있었던 거 한번 더 드시고 가시라고.
그리고 하나로마트 제주닭강정 순살후라이드 한 마리, 감자튀김도 하나.
우리가 애정하는 넙덕빌레에서 먹고 왔다.
물도 많이 차 있고 파도도 제법 높아서 오늘따라 더 '뷰 맛집'이다.
냉장고에 뭐가 많은 것 같긴 한데 막상 하고 보니 뭐가 없다.
엄마 좋아하시는 야채들만 듬뿍 있다.
일단 브로콜리 많이 넣어서 새우구이를 하고,
연두부에 하트양념장 올리고,
제주 냉동오겹살을 구웠다.
뭘 자꾸 뚝딱거리냐고 대충 먹자고 하시는 엄마.
"엄마, 내가 맘은 그게 아닌데..., 엄마 생신상 한 번을 못 차려 드렸더라. 물론 같이 여행도 가고 가서 맛있는 거 먹기도 하고 그랬는데... 내가 차린 생일상이 몇 번인데, 엄마께 하나도 없다는 게 맘에 걸렸어..."
말하다 보니 울컥한다.
엄마도 아셨는지 밥그릇에 얼굴을 묻을 기세다.
오늘은 남편이 오는 날이다.
집 근처까지 버스 타고 와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저녁도 못 먹고 와서 돼지고기 한 장에 소주 2/3병, 복숭아 한 알 먹었다.
집에 오면서 유명한 해장국집을 알아왔다며 내일 엄마랑 공항 가는 길에 먹고 가자고 한다.
사... 왔는데...
맛있어 보이긴 한다.
내일 아침에 엄마 꼬셔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