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눈 부신 가을 햇살

4부 가을: 수확의 계절

by 오소리

14장. 눈 부신 가을 햇살

 가을의 첫 바람은 텃밭 위를 낮게 훑어 지나갔다. 비닐 멀칭은 바람을 머금었다 놓으며 잔잔하게 흔들렸다. 아이들이 흙 위를 밟고 지나간 발자국 사이로 가을빛이 고르게 스며들었다. 정원은 텃밭 한가운데에서 씨앗을 심을 자리를 살피며 버릇처럼 큰 숨을 들이켰다.

  저 멀리 검은 옷차림의 한 학부모가 서 있었다. 학기 초 상담 때도 비슷한 색의 옷을 입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수영의 어머니였다. 그때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수영이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신 뒤… 울고 있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이기 싫었어요.”

아이를 피하게 되었다는 고백은, 벼랑 끝에 선 외로운 여자의 절박한 고백처럼 들렸다. 정원은 그 마음을 들으며, 소중한 아들을 살리고 싶었던 그녀에게 자신이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지푸라기처럼 느껴졌다.

사랑해서 멀어진 거리.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기엔 수영은 너무 어린 나이였다. 집 안을 무겁게 채웠을 침묵과 공기, 엄마의 무표정한 얼굴… 아이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엄마도, 아이도 서로의 마음을 몰랐고, 말할 줄도 몰랐다. 수영은 엄마의 등을 보면서 얼마나 안기고 싶었을까 그 생각을 하니 수영이 안쓰러워졌다.

 수영 어머니가 정원을 향해 조심스레 걸어왔다. 빨간 장바구니에서 삐죽 튀어나온 비닐 롤이 보였다. 그녀는 그것을 꺼내며 작게 웃었다.

 “선생님… 혹시 이거 필요하실까요?”

 “내년에도 텃밭 하시면 쓰시라고…요.”

 말투는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이 작은 행동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 정원은 알고 있었다. 오래 움켜쥐고 있던 마음을 건네는 일—그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때 뒤에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엄마! 왜 여기 왔어?”

 수영이 모자는 삐뚤어졌고, 운동화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거… 너 안 가져간 줄 알고 가져왔지.”

 “아… 이런...”

 말투는 딱딱했지만 귀 끝이 살짝 붉어졌다. 정원은 둘 사이의 긴장을 자연스럽게 가라앉히려 했다.

 “어머니, 수영이가 텃밭 대장이에요. 오늘도 텃밭에서 일 많이 했어요. 손이 아주 빨라요.”

 그녀는 정원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선생님… 수영이가 요즘 집에서 밥을 잘 먹어요.”

 그 말엔 조심스러운 기쁨이 실려 있었다.

 “어제는 배고프다고 해서요. 텃밭 일… 아주 열심히 했나 봐요.”

 수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배 고팠어.”

  정원은 알게 되었다. 흙을 만지고 몸을 쓰는 동안, 수영은 아주 천천히 자신을 회복하고 있다는 것을. 엄마 밥을 맛있게 먹게 되었다는 것을.

 더 말하고 싶은 듯 보였지만, 어머니는 아이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그럼… 이만 갈게. 수영아, 같이 가자.”

 “……응.”

 짧은 대답이었지만, 발걸음은 엄마 쪽으로 향했다. 정원은 텃밭을 벗어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익숙하지 않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분명 좁혀지고 있었다.


 아… 텃밭이 두 사람을 이어주었구나! 내가 텃밭을 한 건 참 잘한 거야.


이 생각을 닿자 정원의 몸 어딘가에서 천천히 힘이 차오르는 듯했다.

 정원이 주변을 둘러보다 퇴근하는 정교감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목인사를 건넸다. 교감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주차장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정원은 그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제는 그런 어색함이 다시 와도, 예전처럼 마음 깊이 말려들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가을바람이 텃밭 위를 한 번 더 스쳤다. 비닐이 낮게 반짝이며 흔들렸다.
  “내일은 무우 씨앗을 심자.”
 정원이 조용히 말하자, 비닐이 그 말을 반기듯 쨍하게 반짝였다. 가을 햇살이 눈부셨다.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마감이 가까워 오네요. 이 소설도 수확의 시기가 다가오네요. ^&^ 구독이라는 열매를 기대합니다.

화, 금 연재
이전 13화13장 흙을 덮어주는 비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