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흙을 덮어주는 비닐

4부 가을: 수확의 계절

by 오소리

<13장. 흙을 덮어주는 비닐>

 여름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이 다시 돌아온 첫 주였다. 텃밭은 방울토마토가 모두 정리된 뒤라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방학 동안 학교시설주무관님이 뽑아 정리해주신 덕에 곳곳이 평평했고, 여름의 흔적은 몇 줄기 마른 잎사귀 정도뿐이었다.
“와… 텃밭이 사라진 것 같아요!”
아이들은 아쉬움을 말하면서도 어느새 텃밭 가장자리를 뛰어다니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정원은 늘 저 아이들의 에너지가 부러웠다. 슬픔도, 화도, 짜증도 가볍게 털어내고
다시 놀이로 돌아가는 그 순진함.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정원의 작은 스승이 되었다. 

“다음 작물을 심으려면 이렇게 비워두는 게 좋아. 흙도 쉬어야 하니까.”
 상희가 흙을 손끝으로 꾹 눌러보며 말했다.
 “선생님, 얽희가 없으니까 허전해요.”
 “그렇지? 근데 이제 가을 준비를 해야지.”

 그때였다. 뒤쪽에서 야릇한 ‘사각— 사각—’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검은 비닐이 길게 끌려오고 있었다. 비닐 끝을 양손으로 움켜쥔 아이—수영이었다. 멀리서도 그의 걸음은 성급했다. 넓은 비닐이라도 접어 오면 될 텐데, 수영은 마음이 급해 비닐을 펼친 채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행동은 빠르고 조금은 덤벙대지만, 그 서두름이 묘한 활기를 불러일으켰다.

 “수영아, 그거 무거울 텐데 괜찮아?”
 “괜찮아요!”
 수영은 숨을 몰아쉬며 멀칭 비닐을 들어 정원 앞에 ‘퍽’ 하고 내려놓았다. 볼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은 가쁘지만 표정은 환했다.
 “이거… 어제 할머니가 주셨어요. 무우 심을 때 쓰라고.”
 정원은 비닐 가장자리를 쓰다듬었다.
 “와, 고마워. 이거면 잡초 안 자라 일하기 정말 편하거든.”
 수영이 잠시 뒷머리를 긁적였다.
 “할머니 텃밭하실 때 저도 거들어서…”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조심스레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 몸을 돌렸다. 승욱이었다.
 “선생님, 도와드릴까요?”
 “그래, 와서 모서리 좀 잡아줘.”
 승욱은 말없이 자리를 잡아 비닐이 날리지 않게 눌러주었다. 두 아이가 함께 비닐을 펼치며 텃밭 위에 내려놓자, 바람이 불며 비닐이 둥글게 부풀었다 내려앉았다.
 “와후, 예쁘구나!”
 상희가 어느새 뒤에 와 있었다. 손에는 텃밭에서 떨어진 흙을 툭툭 털어낸 장갑이 들려 있었다.
 정원이 웃으며 물었다.
 “상희야, 너도 도울래?”
 “네.”
 상희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비닐 가장자리를 잡으며 두 아이를 힐끔 바라보았다. 수영은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고, 승욱은 묵묵히 손을 보탰다. 두 아이 모두 한참 전보다 훨씬 단단해 보였다.
 상희는 속으로 말했다.

‘나는 왜 저렇게 못할까. 난 늘 말만 앞서갔지…’
 비닐이 예쁘게 자리 잡자 상희가 말했다.
 “선생님, 이거 내일 애들이 보면 너무 좋아하겠어요.”
 “그렇지? 너희 셋 덕분이지.”
 상희는 그 말에 얼굴이 조금 화끈거렸다. 자신도 누군가를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정원은 살짝 숨을 고르며 말했다.
 “얘들아, 멀칭은 흙이 새 씨앗을 맞기 전에 덮어주는 이불 같은 거야. 흙이 잘 쉴 수 있게.”

 비닐은 햇빛을 받아 까만 바다처럼 반짝였다. 텃밭은 어느새 가을 준비를 마친 얼굴이 되었다.
 승욱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그럼 이번엔 뭐 심어요?”
 정원이 눈을 반짝였다.
 “그건… 당연히 너희가 정해야지.”

 아이들은 즉시 소란스러워졌다.
 “무우!”
 “감자는 어때?”
 수영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무우! 뽑아보고 싶어요!”
 아이들이 순식간에 동조했다.
 “그래! 무우 하자!”
 정원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럼 가을 작물은 무우로 결정!”

 상희는 이번엔 딴청을 부리지 않았다.
 “선생님, 무우는 제가 나눠주고 싶어요”
 그 표정은 예전의 과장된 당당함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진정성이 빛났다. 정원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상희가 무우 나눔을 해준다니 너희들도 함께 할 거지?”

아이들의 환호가 가을 햇볕처럼 반짝였다.

수영은 혼자 비닐 가장자리를 다시 한 번 눌러 고정하며 일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어떻게 하는지 알려줬어.”

친구들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하는 수영이를 보며 아이들은 감탄했다. 정원은 자신의 마음이 따뜻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말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교실에서는 종종 핀잔을 듣는 아이였지만, 자연 속에서는 누구보다 제 몫의 일을 잘 해내는 아이로 존중받고 있었다.

가을바람이 스치자 비닐이 볼록하게 들썩였다. 씨앗을 심을 생각에 들떠 킥킥거리던 아이들의 분위기가 비닐 안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텃밭 전체가 설레는 것처럼 흙 위가 한층 포근해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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