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가을: 수확의 계절
16장. 땅 속의 뿌리
서리가 얇게 내려앉은 아침, 텃밭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무우 잎은 축 늘어져 찬 공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잎맥 끝에는 여전히 단단한 힘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장갑 낀 손을 비비며 텃밭 앞으로 몰려들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부풀었다.
“선생님! 이제 뽑아요?”
“텃밭 나온 거 보면 몰라? 맞죠, 선생님.”
“응. 무우는 속이 다 찼을 때 이파리가 축 늘어져. 지금이 딱이야.”
정원이 잎을 하나 들어 올리자 아이들의 얼굴이 동시에 환하게 밝아졌다.
“자, 잡아. 하나, 둘— 셋!”
그 순간, 흙 속에서 ‘쑥!’ 하는 소리가 터지며 무우가 빠져나왔다. 아이들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으아아! 이거 봐요!”
“헐! 팔뚝만 해!”
“이건… 내 얼굴만 하잖아!”
하얀 무우가 진흙을 털며 모습을 드러냈다. 잔뿌리 사이로 흙물이 주르르 떨어졌고, 햇빛을 받아 속살이 반짝거렸다. 아이들은 제각기 무우를 들고 서로에게 보이며 정신없이 웃어댔다.
“선생님! 김장할 때 넣으면 국물이 진짜 시원하대요!”
“이번 주 우리 할머니 집 김장한다는데 가져 가야지!”
정원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겨울 햇빛 아래에서 튀어 오르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수영이 무릎을 꿇고 땅 깊은 곳을 파고 있었다. 그는 잎줄기를 두 손으로 단단히 잡고 몸을 뒤로 젖혔다.
“수영아, 이쪽도 같이 들어줄래?”
수영은 무우를 들다 말고 손을 놓았다.
“아… 아니요.”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조금 늦게 두 손을 뻗었다.
아이들이 구령을 붙이는 소리가 잠깐의 침묵을 깼다.
“하나, 둘— 으라차!”
엄청난 크기의 무우가 ‘퍽’ 하고 흙을 밀어내며 올라왔다. 뿌리는 길고 굵었다.
아이들은 보물 찾듯 무우를 캐냈다. ‘쑥’, ‘툭’, ‘퍽’ 하는 소리가 이어졌고, 웃음과 감탄과 발을 구르는 소리가 텃밭을 채웠다. 서로의 얼굴에 묻은 흙을 털어주는 손길도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상희가 있었다.
예전처럼 중간에서 소리 지르거나 우쭐거리지는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영아, 장갑 여기. 네 손 얼었잖아.”
상희는 수영에게 장갑을 건네고, 승욱이 들기엔 너무 큰 무우를 옆에서 잡아주었다.
“승욱아, 이건 두 손으로 들어야 해. 같이 들까?”
승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희와 함께 무우를 들어 올렸다. 둘의 손에 흙이 묻었지만, 얼굴에는 어색해하는 웃음이 번졌다.
또 다른 친구가 소리쳤다.
“상희야! 이거 두 개 붙어 있는 무우야! 어떻게 묶어?”
“잠깐. 내가 테이프 가져올게!”
상희는 달려가 테이프를 가져와 묶어주고, 바구니에 차곡차곡 정리해 담았다.
정원은 그 모습을 보며 놀라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다. 상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리더라고 외치지 않아도 아이들 사이에서 중심에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그 표정은 이전처럼 ‘인정받고 싶은 표정’이 아니라, ‘도울 수 있어 좋은 표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구니는 무우로 가득 찼다. 길쭉한 것, 둥근 것, 둘이 붙은 것, 웃는 얼굴처럼 생긴 것까지 다양했다. 아이들은 서로의 무우를 들여다보며 또 한 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 제 거는 두 개가 붙어 있어요!”
“얘는 허리가 있어요! 사람 같아요!”
정원은 무릎을 굽혀 무우의 흙을 털어내며 한참 웃었다. 손끝은 차가웠지만 마음은 오래 따뜻했다.
“선생님, 이거는 제가 나눠줄게요.”
상희였다. 바구니를 양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우리 반 무우니까… 제가 나눠주고 싶어요.”
정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하면 친구들이 더 좋아하겠다.”
상희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회장이 아니어도 괜찮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상희는 웃으며 아이들에게 무우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모두 웃었고, 상희도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중심으로 서 있었다.
아이들이 돌아간 뒤 텃밭에는 정원만 남았다. 겨울 볕이 고랑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 정원은 아이들이 캐 올린 무우 가운데 가장 긴 것을 바라보았다. 흙을 털자 하얀 뿌리가 드러났다.
“선생님, 이거 뿌리 봐요. 엄청 깊었어요.”
“그러게. 보이는 것보다 아래에서 훨씬 오래 자랐겠지.”
정원은 무우를 내려다보며 방금 아이들과 나누었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땅속에서 이런 뿌리가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건드렸다. 발이 떨어지지 않던 날들, 몸이 무거워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던 시간들에도, 그 안에서는 무엇인가 자라고 있었던 건 아닐까.
정원은 지난봄을 떠올렸다. 봉긋하던 목련의 꽃망울, 다정하게 몸을 일으키던 개나리, 자전거를 타면 졸졸 따라오던 강물 소리, 함께 웃으며 달리던 얼굴. 차가운 계절 속에서 그 좋던 기억들은 한동안 얼어붙어 있었다.
정원은 휴대폰을 꺼내 오래된 기록을 천천히 훑다가 화면을 눌렀다.
–메시지 삭제.
–모두 삭제.
화면이 깨끗해졌다. 그 빈자리 위로 정원의 긴 숨이 미끄러졌다. 정원은 고개를 들었다. 텃밭 위로 햇빛이 조금 더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정원은 무우를 바구니에 담아 들고 방향을 바꾸었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발걸음은 겨울보다 앞서 나아가고 있었다.
* 흙의 시간의 주제를 담고 있는 장이라 신중하게 편집하게 되는 군요. 다음 프롤로그를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