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있어야 형이지.
중학교 때 할머니 환갑잔치를 했다.
대기업에 다녔던 아빠는 롯데월드 마법의 성이 창문으로 보이는 롯데 호텔에서 할머니 환갑잔치를 했다.
고모들이며 삼촌이며 조카들이며 다 불러다가 호텔 뷔페를 먹였다.
하늘에 뜬구름 같은 하얀 모자를 눌러쓴 요리사 아저씨들이 음식을 만들고 내 접시에 음식도 덜어 주었다.
나도 내 동생들도 멋지게 옷을 차려입고 롯데 호텔에서 뷔페를 먹었다. 초콜릿 케이크며 아이스크림이며 몇 번이고 퍼다 먹었다. 배가 불러도 또 퍼다 먹고 그랬다.
10년이 지나고 우리 할머니가 70 살이 되거든 할머니의 칠순잔치도 호텔에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진사가 가족사진을 찍어줄 때 고모 옆에 서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빠가 대기업을 관두고 아파트를 팔았다. 차들이 내 옆으로 달리면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시골로 이사를 했다.
아빠는 정장 대신 일바지라 불리는 바지를 입었다. 시골집에서 엄마 아빠는 자주 싸웠다.
엄마 아빠가 싸우던 날 엄마가 아끼던 화분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서 아작이 났다. 작은 돌멩이며 흙이며 지저분하게 바닥에 토해내고 있는 그 모습이 나는 꼭 우리 집 같았다. 할머니 생신이던 날 아빠와 나는 수박 한 통을 사들고 고모가 살고 있는 잠실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어른들을 싸웠다. 아빠 정성스럽게 고르던 수박은 현관 바닥에 깨져 시뻘건 속을 다 내보였다. 마트에 있는 모든 수박을 손으로 통통거리며 제일 좋은 소리가 났던 수박을 사 온 것인데, 그걸 먹지도 못했다. 차가운 아파트 현관 바닥에 아빠의 자존심 같은 빨간 수박이 뭉개져 있었다.
나는 그때 고작 열몇 살 짜리 애라 아빠한테 아무 말하지 못했다.
위로하고 싶었다.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 씩씩거리며 멀어져 가는 아빠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할머니 칠순잔치는 하지 못했다. 아빠가 돈이 많을 때는 형님이고 오빠고 하던 친척들이, 돈이 없는 아빠와 내가 정성껏 고른 수박 한 통을 들고 가도 열어주지 않는 문을 보면서 나는 또 그 어린 나이에 돈 생각을 했다.
돈이 없으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형님 대접도 받지 못하는 우리 아빠를 보면서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기억들은 발가락 사이에 생긴 티눈처럼 도려내고 밴드를 붙여놔도 없어지지 않는다.
나는 그때 고작 열몇 살 짜리 애였는데도 돈 없으면 사람 구실을 못한다던 그 말을 어렴풋이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