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임대주택에 살면 영구거지라고 한다면서?
할머니와 영구 임대 주택에서 살았다. 가깝게 갈 수 있는 길을 나는 일부러 비잉 돌아다녔다. 떳떳하지 못했다. 내가 사는 곳에. 그리고 글 모르는 우리 할머니가.
대기번호 4번이었나? 5번이었나. 내가 지원항 4년제 지방대.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합격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들어간 지방대는 채 2년을 다니지 못하고 자퇴를 했다.
우리 엄마는 직원이 50명도 되지 않는 작은 시골 공장에서 청소를 한다. 아빠는 용달일을 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아빠 다리 위로 코끼리 만한 기계가 떨어졌다. 아빠는 사고 이후 다리를 절뚝거렸다.
아빠 다리에 철심을 박았다. 철심을 박은 다리는 자꾸 얇아졌다. 아빠는 걷다가도 곧잘 앞으로 고꾸라졌다.
중학교까지 살던 시골집 화장실에는 곰팡이가 많았다. 원래는 그렇게 많지 않았었다. 한두 개 피어나던 곰팡이가 한 달도 안 되어서 한쪽 벽을 뒤덮었다.
국민학생 때부터 그러니까 1990년 때부터 엄마를 따라 일을 했다. 엄마가 부업으로 가져온 전선 같은 것 들을 똑딱 소리가 날 정도로 끼운다. 그리고 또 끼우고 또 끼운다. 그럼 그게 한 개당 몇 원이라고 했다.
"엄마 몇 원이면 얼마야? 십원도 아니고. 이렇게 해서 우리 언제 부자 되는 거야?" 내가 말하면 엄마는 그냥 웃었다.
겨드랑이에 보슬거리는 털이 나기 전. 긴 머리를 자르고 똑 단발 중학생이 될 무렵 무터 나는 많이 맞았다. 매질을 하던 아빠 얼굴. 옆에서 "너는 좀 맞아야 돼." 장단을 맞추던 엄마 소리. 나는 이제 40이 넘었는데 그런 것들은 하나도 잊히지 않아. 참 이상해.
글을 쓴다. 내가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잊고 싶었던 기억. 꼭꼭 덮어두고 꾹꾹 눌러버린 검은 장아찌 같은 어둡고 아픈 이야기들.
그때의 나를 돌아본다. 글을 쓰면서 나를 안아주고 감정을 배운다.
묻어버린 나쁜 기억은 나도 모르게 하나둘씩 새어 나왔다. 나를 아프게 했다. 어떤 날을 몸이 물먹은 솜이불처럼 무거웠다. 하루종일 침대 위에만 있었다. 그게 일주일, 한 달. 세 달 동안 침대 위에 내가 나를 묶어놓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기억들을 굳이 끄집어내기로 했다. 한 개씩. 한 글자씩. 그 기억을 글로 쓰기로 했다. 글을 쓰면서 감정을 기록하기로 했다. 더 늦어지기 전에 더 아파지기 전에.
글을 쓰고 나는 어쩐지 강해진 마음을 보았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