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긴 어때 돈 버는 게 다 똑같지.
"내가 다시 유치원 선생하면 성을 간다 성을 갈아."
그랬다 나는 성을 갈았다. 이 씨 아니고 리 씨로.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캐나다까지 와서도 유치원 선생을 했다. 사실 캐나다까지 와서 유치원선생을 하고 싶진 않았다. 한국에서 만난 수많은 도라이 엄마들과 도라이 원장님. 그래 그 정도면 됐다 싶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는 성선설을 믿는 나였다. 유치원 생활 5년 만에 어쩌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는 성악설이 더 맞을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내가 캐나다에서 처음 유치원 선생을 한 곳은 캐나다 뉴펀들랜드였다. 뉴펀들랜드? 뭐 어디라고? 그렇다. 나도 뉴펀들랜드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캐나다에 내가 아는 곳은 토론토, 밴쿠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공유오빠가 도깨비로 나온 퀘벡이 전부 었다.
왜 넓고 넓은 캐나다 땅덩이리에서 굳이 그 먼 곳 뉴펀들랜드까지 기어 들어갔냐고 물으면 그것도 눈물 없이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빠른 이민 보장. 빠른 취업 보장. 그 문구에 혹해서 나는 전재산을 잃고 취업사기를 당했다.
한국에서 투잡 쓰리잡 하며 벌었던 돈이었다. 그 돈을 잃고 나서 나는 날개가 다 찢어진 잠자리처럼 휘청거렸다.
하루 이틀. 툭하면 울음보가 터질 것 같은 나를 보다 못한 esl 선생님이 말했다.
"뉴펀들랜드로 가봐 거기는 취업하기 쉬울 거야." 그랬다. 나는 그 선생님의 한마디에 모든 걸 걸었다. 송혜교도 아니면서 올인을 외친 거다. 원래 인생이 그렇다 모 아니면 도 아닌가. 어차피 날린 돈 무라도 썰어야 했다. 캐나다 가서 취직한다고 한국 떠날 때 큰소리를 쳤던 나였다. 성공한다고 보란 듯이 잘 살 꺼라고. 그래. 맞아. 취업사기 당하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는 건 아니니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아 그건 나를 보고 한 얘기였다. 무식하고 용감까지 한 나는 클릭 두 번에 뉴펀들랜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샀다.
아무 정보도 없이 이민가방 두 개와 뉴펀들랜드에 도착했다. 3월의 뉴펀들랜드는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뉴펀들랜드에서도 시골지역이었던 굴스라는 곳에서 생활을 했다. 버스라고 해봤자. 한 시간에 한대. 그마저도 눈이 많이 온다던가 날이 궂으면 버스는 운행하지 않았다. 아 그리고 몇 달간은 버스가 파업도 했다.
가지고 있는 돈도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급했다. 일을 구해야 했다. 나를 도울건 나밖에 없다.
이력서를 돌리기 시작했다. 영어의 영자도 모르는 영심이 같은 내가 구글에 물어가며 이력서를 만들었다. 15년 전이라 chat gpt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한 가지 믿을 구석이 있었던 건 한국 보육교사 자격증을 캐나다 앨버타의 자격증으로 바꾸었다는 것. 나는 캐나다 앨버타 정부에서 입증된 보육교사니까 뉴펀들랜드 유치원에서도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도서관에서 프린트한 이력서를 들고 뉴펀들랜드 유치원 문을 두드렸다.
"도를 아십니까?"
가 아닌 "사람 구하시나요?" 바들거리는 이력서를 들고 몸까지 바들거렸다. 아니. 말도. 영어도 바들바들.
"왓?" 코 앞에서 대차게 문이 닫혔다. '아니 저 아직 말 안 끝났는데요. 아니 캐네디언은 나이스 한다던데. 뭐죠?' 몇 번은 눈만 끔뻑거렸다. 잡상인. 귀찮은 사람. 내가 그런 존재라고 느껴졌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다. 가져온 돈이 다 떨어져 가니까. 사실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티켓도 살 만한 돈이 없었다. 무식한 나는 신념을 가지기로 했다.
취직 꼭 한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유치원 문을 노크했다. 똑똑. 혹시 사람 구하시나요? 물론 전화도 했다. 문제는 전화영어였다. 나의 영어를 전화로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 '아니 왜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전화를 끊으시나요?' 나는 뚜-뚜 거리는 전화기를 붙잡고 혼잣말만 했다.
중학생 때 즐겨 들었던 임종환 씨의 그냥 걸었어가 생각이 난다.
우우 우우우우 우우 우우
나 그냥 갈까 워워워워
워워 워워
워워 워워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