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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 Aug 02. 2022

슬픔을 묻는 법을 알고 싶었다.

_ 나의 난임 이야기 : 시험관을 하다.




슬픔을 묻는 법을 알고 싶었다.

_ 나의 난임 이야기 : 시험관을 하다.




오랜만에 꺼내보는 우리의 아름다웠던 결혼식.  


나의 가족은 남편과 나 이렇게 둘이다. 너무나 간절히 셋이 되고 싶었던 시간들이 있었지만 결국엔 다시 둘이 되었다.


올해로 결혼 8 .  고르기를 하고 뒤돌아보니 8년이라는  시간의 흔적들이 우리 곁에  쌓여 있었다.

나는 30 중반, 남편은 30 후반의 조금은 늦은 나이에 만나  2년의 연애를 했다. 서로의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흔히들 말하길, 결혼할 사람은 느낌이 온다더니 정말 그랬다.  우린   흐르듯  자연스레 결혼을 했고 불완전한  삶에 안정감을 주는 사람을 만나   인생은  결혼 전과 비교해서 훨씬 단단해져 갔다.  

결혼 8 차가 되니 어딜 가도 자연스레 자녀 유무를 궁금해한다. 아이가 없다고 대답하면 여전히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상대자는 놀라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다음 질문은 딩크족이냐고 묻는다. 나의 대답은 선택적 딩크족이 되었다고 대답한다.  정확히 말하면 난임으로 인한 선택적 딩크. 그래서 현재 우리에겐 아이가 없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글로 무덤덤히  내려가는  모습에  흠칫 놀라기도 하고, 어지럽던 마음이 얼마만큼 치유가   같아서 다행스럽기도 하다. 우리에겐 한동안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조차  힘겨웠던 시간들이 있었다.



결혼을 하고  2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걱정이 되어 난임 병원을 찾았다. 자연 임신을 원해 병원의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기도 했지만, 노산이라는 위험 앞에서 무작정 아이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흘려보낼 수도 없었다. 의학적 도움을 받으면 자연 임신보다는 확률이 높을 거란 판단에 의사 선생님과  상담    인생에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시험관을 도전하기로 했다.


한 번에 성공하면 로또 당첨이라고 할 만큼 쉽지 않다는 건 그동안 주변에서 익히 들었다. 나는 아닐거란 기대에 무색하게 나는 시험관 1차에서 착상조차도 되지 않고 깔끔하게 실패의 쓴맛을 봤다. 어쩌면 준비되지 않은 채 노력 없이 좋은 결과를 얻으려던 나의 욕심이 컸을지도 모르겠다. 그땐 나는 시험관만 하면 어떻게든 아기가 생기는 줄 알았으니까.  

우리 부부는 시험관 시술이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란 것을  1차 때 경험했기에  몸부터 만들고 다시 2차 준비를  하기로 했다. 남편은 오랫동안 숙제처럼 끊지 못했던 담배를 끊고 운동을 시작했다.   나는 시험관 준비에 도움이 되는 약을 지어먹으면서 건강한 아기를 만나기 위한 첫 단계부터 다시 시작을 했다.  그렇게  3개월의 시간을 함께 노력하며 준비를 한 후  8월 더운  어느 여름날,  2차 시험관에 도전했다.



*시험관 시술 과정 *

시험관 시술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선 여자에게 난자를 최대한 많이 채취하기 위해 고용량의 호르몬 주사와 약을 투여해 과배란을 유도한다. 일명 ‘배 주사’를 매일 일정한 시간에 직접 배에 주사한다. 배란유도제 주사를 10~11일 정도 맞고, 초음파로 난포가 성숙해졌는지 확인하면 본격적으로 난자를 채취하게 된다. 여자가 수면 마취 후 얇은 바늘로 난자를 채취하는 동안, 남자는 난자 채취 시술 당일 병원에서 정자를 채취한다.

채취된 난자와 정자를 수정시킨 후 수정된 수정란을 3~5일 체내와 비슷한 환경에서 배양하고, 이후 수정된 배아를 자궁 내에 이식한다. 배아를 이식한 뒤 11~12일 정도 지나면 피검사를 통해서 임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시험관 시술을 하는 데에는 보통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경험이 무섭다더니  과정을  알고 있어서    호르몬 주사와 약은  용량이 더  많아졌음에도 2차 땐  생각보다 몸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수정란을 이식받은 후 임신 확인이 가능한 2주의 기다림이  시험관 과정 중에 정신적으로  제일 힘든 순간이었다. 실패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그 감정들을 오롯이 견디는 것.  나의 모든 신경세포가 예민해져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미세한  몸의 작은 변화 하나하나가 모두 느껴졌다. 그저 착상이 잘되길 기도하며 잘 버티어 주기를.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임신 결과는  하늘에 맡겨야 했다.

시술을 받은 후엔  움직이며 활동하는 게  좋다,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한다며 의견이 나뉘는데, 나는 1차 때 일을 병행하면서 했고 실패를 했기 때문에 이번  2차 때는 무조건 누워서  쉬는 쪽을 선택했다.  

1분이 하루 같던 길고 길었던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일을 당분간  쉬기로 하고 멍하니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 지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만난 시험관 동지(?)들과  증상을 공유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시간들로  시간을 이겨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난임으로 지치고 긴 터널을 지나는  같은 아픔을 겪고  있기에 잠시나마 마음의 위안을 받는 시간들이었다. 병원을 가기 전날까지 나는 매일을 두 손 모아 기도했다. 꼭 엄마가 되게 해달라고  도와달라고 외쳤다.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을까. 다행히 1차 피검사가 평균치보다 훨씬 높게 나왔다. 이 정도 수치는 아마 쌍둥이일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2차 피검사에서 수치가 두배 이상 올라야 임신 확정이라고 했지만 충분히 임신되었다고 했다. 그날 병원에서 바로 산모 수첩을 받았다. 담당 의사는 얇게 미소를 띄우며 고생했다며 다독여줬다.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리고 한 주가 지나 2차 초음파를 하러 갔을 때 놀랍게도 쌍둥이를 임신한 걸 알았다. 나의 뱃속에 두 개의 아기집과 그 속에는 난생처음 보는 쌀알만 한 아기의 형태가 있었다.

너무나도 신기하고 기뻤다. 정말 기뻤다.


‘안녕? 아가야.’


다시는 시험관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쌍둥이가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한 적이 있었는데.    1차 때 실패의 아픔을 보상이라도 하듯 두 개의 아기집이라니. 쌍둥이 엄마라고? 기쁨은 두 배로 컸다.  글로도 그 당시의 기쁨을 담아내기 힘들 정도로  기뻤다.


임신이 된날 서랍에 넣어둔 용품을 꺼내보았다.


나와 남편은 엄마와 아빠가 된다는 생각에 조금 들뜬 마음으로 매일을 보냈고 다음 진료를 기다렸다. 앞으로 태어날 쌍둥이 육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딸일지 아들일지 성별도 모르는 아이의  이름도  지어보았다. 태어날 쌍둥이 아기에 대한  설레는 따뜻한 이야기로 매일 밤을 가득 채워나갔다.  


행복한 시간은 나에게 사치였을까. 2주 후 초음파를 보러 간 날 의사 선생님은 화면을 심각하게 쳐다보더니 두명중 하나의  아이의 심장이 뛰지 않고 멈추었다고 했다. 나머지 한 아이는 심장이 너무 약하게 뛴다고 하셨다.  어둡고 좁은 초음파실은 적막이 흘렀다. 의사 선생님.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건가요? 아니 갑자기 이렇게 될 수가 있나요?   평균 주수   아기보다 크기도   작다고 했다. 그래서 한 주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때 나는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  예상했다.  다가올 예후가  좋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다시 끝없는 숨 막히는 기다림. 그 한 주가 나에겐 너무나도 지옥 같았다. 무더운 한여름날, 몸을 따뜻하게 하고 에어컨도 틀지 않은 채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며 또 하염없이 기다렸다.  남은 한 명의 아이를 어떻게든 지켜야 하지만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현실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 이런 걸까.


조마조마한 기다림 속에 다시 초음파를 했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머지 아기의 심장도   이상 뛰지 않았다. 이미 심장이 멈춘 상태였다.  그렇게  아이는 임신 11 차를 넘기지 못하고 별이 되었다. 나는 다음  바로  소파 수술을 했고 마취가 풀리고 정신이 돌아왔을    세상이 멈춘 듯했다. 베개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 없구나. 소파수술은 당일 퇴원이 대부분인데  수술 통증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심해 하루 입원까지 해야 했다.


왜.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의사 선생님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하셨고 세포 유전학 검사 결과 부부 염색체는 정상이며 아기는  염색체 이상으로 유산이 되었다고 했다. 막달까지 크지도 못했을 것이고 태어나도 심장 기형이었을 거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들었다. 나중에  받아본 검사지에는 성별까지 확인을 할 수 있었다.  아들이었다.


쌍둥이 임신으로 누구보다 기뻐했던 가족들, 지인들, 친구들... 그리고 제일 좋아하던 남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잘못이 아니야. 이건 누구의 잘잘못이 아니라잖아..  번을 되뇌어보지만 욱여넣은 슬픔을 막지는 못했다.


소파 수술 후  일상을 살아내야 했지만 유산 후유증으로  산후풍을 심하게 겪었다.  손가락, 발가락 나의 몸의 모든 관절이 시리고 아팠다.  연달아 이어진  시험관 시술을 하느라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에서 임신과 수술을 하니 버티지 못했다.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몸상태가  돌아오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한의원과 병원을 다니며  회복에 힘쓰고 마음을 치유하려고 노력을 했다. 어쩌면 나보다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는 남편과 나는  애써 웃으려고 노력했다.  웃으려 할수록  아물지 않는 마음을 모르는 척 덮어두는 것일 뿐이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벗어날 수 있을까. 누군가 슬픔을 묻는 법을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하루를 살아내고 우리의 삶에 더 집중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매년  돌아오는 여름날의 끝엔  시리게 아팠던 나를 마주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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