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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 Aug 27. 2022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게 해 줘서 고마워

둘에서 셋이 되었다





_소란스러운 마음


그렇게 또 모질게 시간이 흘렀다. 나름 씩씩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진해지는 기억을 안은채  30대의 마지막에 섰다. 삶의 방향에 어떠한  정답과 오답이 없는 것을  알지만  마음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험관을 다시 한번 더 해볼까? 40대가 되면 확률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험관과 유산이 반복되었던 지난 시간 동안 나에겐 3명의 조카들이 태어났다. 사랑스러운 조카들을 아주 가까이서 지켜볼수록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남편이 어린 조카들과 놀아줄 때의 해맑은 눈빛을 보면 얼마나 아이들을 좋아하고 원하는지 느껴졌다.   남편과 나와 닮은 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온통 물음표가 가득한 하루하루가 아깝기 시작했다.


남편은 내가 시험관과 유산의 아픔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선뜻 다시 시도해보자고 말을 하진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남편은 아이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것을.  

나도 간절히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설마 나에게 또 한 번 시련이 있겠어? 그래, 40살이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전해보자!!  실패의  두려움이 컸지만  소란스러운 마음을  어렵게 정리했다.



소란스런 마음을 바다앞에서 비우다.




_ 다시


어렵게 마음을 굳혔으니 어떻게든  이번에는 성공하고 싶었다. 난임으로 유명한 몇 군데 병원 중 성공사례가 많고 후기가 좋은 의사 선생님이 있는 다른  병원으로 전원 했다.  새로운 난임 병원 선생님은  지난 나의 시험관,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시고 많은 공감을 해주셨다. 특별한 이유 없이 유산이 되는  나의 상황 또한  안타까워해 주셔서 그동안의 고통들이 잠시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왠지 이번엔  잘될 거 같은 막연한 믿음도 생겼다.


 선생님은 3차 시험관을 시작하기 전   몸을 먼저 만들기 위해 먹는 음식부터 전부 바꿔보기를 권했다. 저염식, 자연식을 하며 입에 들어가는 모든 음식부터 전후 바꿔보기를 권했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먹던 커피와 빵이 하루아침에 끊어졌다. 절실한 상황에 맞닿으니 먹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임신에 필요한 영양제와 약도 다시 처방받았다. 6개월 동안 지독하게 식단을 지키며 또 우린 다시  처음부터 준비를 했다. 퇴근 후 남편과 함께 PT를 받고 매일 밤 함께 한강을 뛰며 건강한 몸을 만들기에 시간을 쏟았다. 이번에는 가족들에게도 온전히 비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둘이서 조용히 3차 시험관을 준비했다.


다시 , 하나씩 일상을 변화시켰던 날들.




_무너져내리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모두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이야기였을까?

왜 노력해도 되지 않는 걸까. 배아 상태도 상급이었고  임신이 되었는데   12주가 되기도 전에 또 심장이 멈추어 버렸다.  검사 결과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데. 왜! 왜! 안 되는 것일까. 이번에 순탄하게 흘러가서 정말 될 줄만 알았다.  

어렵게 힘들게 다시 도전한 시험관은 3차도 , 또 그 이후  4차까지 모두 실패로 끝이 났다.  그렇게 또 1년의 시간이 기쁨과 슬픔의  반복으로 끝이 났다.

반복된 실패가 거듭될수록 자신감 넘치게  살아온  그동안의 내 모습은 산산조각이 되어  공중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어쩌면 내가 엄마가 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켜켜이 짓눌러둔 불안함과  불안감에 너무 괴로웠다 4년이란 시간을 오롯이 시험관에 집중하며 지냈고 병원에서  임신이 잘되는 몸이라고 하는데도 ‘마의 12주’를 넘기지 못하고 시험관 4차까지 모두 유산이 되었다.  

어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덤덤하게  받아들이자며 남편과 굳게 약속을 했지만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또, 다시 무너져버렸다.







_마음속 어느 공간에도 작은 틈을 내어주지 않고 주변의 따뜻한 손길들을 모두 밀어냈다.


제정신으로 사는 게 쉽지 않았다. 내 세상을 지키는 게  나에게 감담이 되지 않을 만큼 버거웠다.  이 시간들을 인생에서 지울 수만 있다면 완벽히 지우고 싶었다. 4년 동안 나를 제외하고 주변의 모든 기혼자들이 아기 엄마가 되었다. 가족들, 친구들, 지인들. 첫째를 가지고 둘째 소식까지… 겉으로는 웃으며 그들을 축하하면서도 마음은 하염없이 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진 않는다. 그저 내 처지가  안타깝고 싫었을 뿐이다. 그때의 마음의   감정을 과연 글로 오롯이  담을 수가 있을까.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나는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다. 자리를 계속  비웠기 때문에 사람들에겐 상황 설명이 어느 정도 필요했고  임신한 걸 아니 당연히 축하  안부를 물을 수밖에 없고, 유산을 했다는 사실 또한  숨길 수 없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아껴주는 주변의 많은 분들이 나의 상황을  같이 슬퍼해주고 걱정을 해주셨다. 그러나  나를 향한 수많은 격려의 말조차 부담스러운 날들이었다.


  마음속 어느 공간에도 작은 틈을 내어주지 않고 주변의 따뜻한 손길들을 모두 밀어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해의식, 대인기피증 , 자격지심만 가득한 나로 변해 있었다.  삶의 모든 것에 회의감이 느껴졌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몇 번의 여름이 지나도 여전히 상처받은 마음이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_여행을 가다.


힘들어하는 나에게 남편은 일본 여행을 제안했다. 일본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다. 아기자기한 소품샵과 가구들 , 골목골목 마주하는  소소한 풍경들은 미술을 전공한 우리에겐 많은 영감도 안겨주는 곳이라 자주 갔던 곳이다. 시험관을 준비하고 임신과 유산을 반복하느라  여행의 즐거움을 잠시 잊고 있었다. 2주 정도 어렵게 휴가를 내어  일본 교토로 떠나게 되었다.  숙소만 정하고 우리는 그저 발길 닿는 곳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목적지 없이 걸으며 새로운 곳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밤마다 숙소 근처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그동안 식단 조절하며 참았던 음식들을 마음껏 먹었다. 그동안 일하면서 내일의 일정을 걱정해서 몸을 사리고 컨디션 조절하며 긴장된 삶을 살았는데 이렇게 마음이 편했던 적이 있었을까?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로움이 그동안 갇혀있는 나를 해방시켜주는 것 같았다.


유리야. ..

이렇게 우리 둘이 즐겁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각자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하니까. 이제 힘들게 아기 갖지는 말자. 나는 너만 있으면 


남편은 마치   고백이라도 하듯 주저하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미안함과 고마움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먹먹했다. 그동안 참고 있었던 서러운 눈물들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우리는 약속했다. 우리의 인생을 살아보자고. 우리의 삶에  더 이상 차갑지 않고 따뜻한 빛이 머물러 주길 바랬다.. 그리고  우리는 예정된 여행 기간보다 일주일을 더 여행하며  돌아왔다. 지금도 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본다면 교토 여행의  잔상이 떠오른다.


발길닿는대로  무작정 계획없이 다녔던 교토 여행





_ 안녕. 그리고  안녕.


일상으로 돌아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조금은 밝아진 나의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나의 인생에 더 이상의 아픔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던 어느 날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배 멀미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2번을 임신을 해보았기 때문에 바로 알아챘다. 이건 분명 임신했을 때의 딱 그 느낌과 같았다. 날짜를 더듬어 보니  이번 달 생리 예정일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어딘가 구석에 처박아 둔 남아 있던 임신테스트기를 찾았다. 결과는  너무 선명하게 두 줄이 나왔다.  다시 확인하고 또 확인을 했다. 두줄이었다.

이게 무슨 신의 장난인 건지. 그렇게 마음을 비우면 생긴다더니. 정말 모두 포기하고  마음을 비우니 자연 임신이 되었다. 감사하게 40살에도 자연 임신을 할 수 있는 몸이구나. 그동안 원망했던 신에게 감사했다. 다시는 지난 일을 겪고 싶지 않았고 기쁨이 달아갈 가봐 숨죽여 매일 밤을 기도했다.   나의 뱃속의 아이를 제발 꼭 지켜달라고  울면서 기도했다.  


하지만 하늘은 또 한 번 나의 편이 아니었다. 역시나 12주의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자연 유산이 되었다.

게다가 지난번 유산  소파 수술 후유증이 컸기 때문에  이번엔 선택한 약물 배출이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을 남겨주었다.

유도 분만 약을 3 먹고 4시간 정도 진통을 했다. 하늘이 노랗고 눈이 뒤집히는  같았다.  속에 있는 모든   토하고 배가 찢어질  같은 고통에 정신을 잃을  같았다. 진통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남편이 급하게  119 부르러던   찰나에 복통이 최고조에 달했고   목에서 생전 처음 듣는  비명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갑자기 주먹만  아기집이 와락 쏟아져 나왔다.  의료진 없이 집에서 아이를 낳는 셈이었다. 이렇게 아픈 고통인  알았으면 병원에서 입원했어야 하는데.  약물 배출을 선택했는지 너무 후회했다.  진통의 순간들은 아마 평생 두고두고 잊지 못할  같다.  안에서 진통을 하는 모습을 지켜본 남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날   방에서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우리  기억에 선명히 자리 잡아 있다.


아기집이 나오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진통은 사라졌고 나는 거의 탈진을 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쓰러진 나와 남편은 방 안에서  밤새도록 부둥켜안고 울었다. 둘만의 아픔을 겪고 나서 일까 그날 이후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 더 단단해짐이 느껴졌다.  말하지 않아도  진심으로 서로를 응원하며  위로하며,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내게 되었다.  





무기력한 시간들이 걷히고 나니

그 시절 그 언저리에서 머물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차가운 바람이 할퀴고 간 자리.

겁을 잔뜩 먹은 나는

도망치고 숨기에 바빴다


나에게 되풀이며 말한다

그냥 후회 없이 지금을 살자.

 

_흔적





_한걸음 물러서 보니 한참을 집착했던 시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다면 길었던 우리 부부의 지난  5년, 조각 난 마음의 시간들이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여러 번의 실패가 나의 인생 전부를  결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세상에는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조금 짙은 아픔들을 가슴에 묻고 그 이후론  쉽사리 꺼내어보진 않았다.

그리고 몇 년간 아이를 가지기 위해 온통 예민했던 날들이  한걸음 물러서 보니 한참을 집착했던 시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43세의 나이가 되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한 번만 더 병원의 도움을 받아보라고 권유하는 분들도 가끔 있다. 이제는  엄마가 되지 못했다는 자책감도,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부담감 전혀 없다. 솔직히 이젠 그 마음에서 많이 멀어진거 같다. 너무나 최선을 다했기에 미련도 후회도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_둘에서 셋이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우리의 삶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가족이 생겼다.


 ‘ 안녕? 뽀삐야 ‘


어쩌면 하늘에 계신 어머님이 주신 선물이지 않을까그렇게  우리는  둘에서 셋이 되었다.

세 가족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낯설고 어색하지만 뽀삐는 우리 부부의 마음속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상처의 흔적을 따스히 덮어주었다.

그리고 뽀삐는 나에게 새로운 이름을 안겨주었다. 뽀삐 엄마. 동물병원에서  뽀삐 엄마로  날 불러주었을 땐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코끝이 찡했다.

엄마.

내  인생에 평생 없었을 뻔한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게 해 줘서 고마워.


인생의 길에는 여러 갈래가 존재한다. 한동안 흐릿했던 길이 선명해졌다.  우리 세 가족은 또 다른 형태의 길에서 엄마와 아빠로, 그렇게 우리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이전 07화 슬픔을 묻는 법을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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