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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 Jul 02. 2022

너에게서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와 닮은 너

너에게서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안내방송 드립니다. 오늘부터 아파트 관리비 납입 기간입니다.’


조용한 아침 적막을 깨는 아파트 관리 사무소의 방송이 흘러나왔다. 일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잠이 덜깬 나는 깜짝 놀랐다. 스피커가 거실 천장에 달려 있어서 집 전체에 소리가 쩌렁쩌렁 크게 울려 퍼졌다.

‘다다다닥.’

어디선가  요란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뽀삐가 남편의 서재방에서 후다닥 나왔다. 나는  소리가 나는 복도를 쳐다보다가 서재방에서 놀란 눈으로 뛰쳐 나온 뽀삐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내가 있는 걸 확인하자마자 귀와 꼬리가 축 처진 채 종종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잠깐동안 멈칫하며 내 무릎 위에  재빨리 올라 앉았다.


어? 뽀삐가 나에게 안겼다고?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황스러움과 기쁨이 동시에 다가왔다. 우린 아직 작은 스킨십도 허용하지 않는 사이인데.이게 무슨 일이지.

 관리실 방송은 스피커를 타고  한 번 더 이어서 나왔다. 큰 소리가 다시 들리니 뽀삐는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작은 머리를 내 겨드랑이 사이로 쏙 집어넣어버렸다. 평소에는 절대! 내 곁에 오지 않던 뽀삐가 낯설고 큰  소리가 꽤나 두렵고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그때서야 뽀삐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지도 처음 알게 되었다.


여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던 방송이 멈춘 후에도 뽀삐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내 다리 위에 앉아 숨을 죽였다. 다리에 닿은 뽀삐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뽀삐의 작은 등위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만지는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살짝만 만져도 심하게 짖던 뽀삐는 그날따라  짖지도 않고 가만히 나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덩달아 내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뽀삐를 키우게 된 후 처음 느껴보는 이 감동적인 (?) 순간들이 행여나 더 만지면 혹시나 도망갈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오히려 더 깊숙이 안겨 있었다. 

 뽀삐와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참 따뜻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있잖아. 손으로 내 마음의 언어를 전달했다.



몇 분동안 나도 뽀삐도 가만히 숨죽여 있었다. 다리에 닿은  빠르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갑자기 귀를 쫑긋 세우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더니 ‘앙’ 하고 짖더니 내 무릎에서 내려갔다. 잡으려고 손을 뻗자 또다시 ‘왈왈 !’ (저리가) 하고 짖었다. 너무 짧았던 우리의 첫 스킨십은 그렇게 끝이 났다. 너무나  아쉬운 맘이 들었지만 뽀삐가 나에게 처음으로 의지했던 순간을 그렇게 기억속에 저장했다.

몇 달이 걸렸지만 차갑고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이 아주 조금  열린 것 같았다.


우리의 첫 스킨쉽. 따뜻한 체온을 처음 느껴본 순간!


우리둘의 미묘한 스킨십이 있고나서 어쩐 일인지 뽀삐는 남편의 방 , 뽀삐가 머무는 방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바쁘게  출근 준비하는 내 주변을  눈치를 보면서 어슬렁어슬렁 거렸다. 눈이 마주치면 피하고 또 내가 다른데를 보면 나를 쳐다보고..마치 밀당하는것처럼 내 곁을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내가 이쪽으로 가면 거리를 두고 따라와 앉고 저쪽으로 가면 또 따라와서 한 발자국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따라 희한하네. 그래도 나를 겁내지 않고 가까이 와 있어서 내심 기분은 좋았다. 

그래도 뽀삐는 늘 그랬듯 고개는 현관문을 향해 있었고 잔뜩 웅크려 겁먹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출근준비가 되어 나가려고 바쁜 움직임을 하는중 뽀삐의 시선이 자꾸 느껴졌다. 분명히 계속 나를 의식하며 나의 움직임을 쫒는거 같았다.

꼭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의 눈치를  살폈다.

뽀삐야. 뽀삐야. 이름을 부르자  뽀삐가 고개를 들어 나를 쓰윽 바라본다. 

슬퍼 보이는 눈이었다. 큰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에서 툭 하고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뽀삐야, 왜 그래?”


나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내 눈에서 먼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가지마?? 

 뭐가 그렇게 여전히 무섭고 두려울까. 거리를 두고 앉아 있던 뽀삐가 터벅터벅 걸어와 내 발 밑에 와서 고개를 들어 큰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가지 마. 어디선가 뽀삐가 했을 리 없는 말이 들려왔다. 내가 나가는 걸 아는 걸까? 혼자 남겨지는 게 싫은 걸까? 뽀삐의 눈을 바라보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몰아쳐 내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뽀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계속 나에게 말을 했다. 사람처럼 말하지는 못하지만 눈을 통해 뽀삐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두고 가지 마."

그 순간 영화 한 장면처럼 뽀삐 얼굴에 내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나의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마치 날 보는 것 같았다.

뽀삐야, 너도 무섭고 두려웠구나?  나도 그랬어.


두고 가지마 .



_나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


나는 겁이 굉장히  많다.   특히 어둠에 굉장히 취약한 편이라 불 꺼진 컴컴한 공간,  밤에 혼자 어두운 골목을 걷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무섭다. 어렸을 때도 그랬고  지금,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나는 왜 이렇게 겁이 많은 걸까? 최근 자주 등장하는  상담 관련  TV 프로그램을 보면   현재의 행동들이  과거 어릴 적 자신의 이야기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상담사들이 어린 시절의 나의 모습의 이야기를  묻곤 한다.  나의 어린 시절 어땠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떠오로는 장면들이  있다. 중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  부모님과  방학 때마다 잠깐씩 떨어져  지냈던  기억의 장면들이다.  그때가 자주 떠오른다면 마음 한구석 트라우마로 남겨져서일까?


 나는  학창 시절을  경남 거창이란 곳에서 초, 중, 고를 보냈다.  거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경상남도의 서북부 끝에 위치한 곳인데  대구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작고 조용한 군 단위의  동네이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을 시작했다. 제법 큰 미술대회마다  상을  받고 재능을 보여서  나의 진로는 중학교도 가기 전부터 미술대학을 가는 걸로 정해졌다.  특히 서울에 있는 미술대학으로 꼭 가고 싶었다. 무조건 시골 생활을 벗어나 서울로 가고 싶었다.  그 당시 나는 서울만 가면 무조건 성공한 사람일 것 같았고 예체능을 하려면 무조건 서울로 가야 한다는 어리석은 (?) 생각을 했었다. 평소 자식 교육에 관심이 많으시고 도시 생활을 하셨던  부모님께서는 그림으로 대학을 갈 거면 시골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해볼 수 있는 도시에서  그림을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작은 동네 미술학원의  세상이 내가 아는 전부였는데 도시로 나가서 그림을 배운다고? 더 넓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큰 고민 없이  바로 결정을 따랐다.  엄마, 아빠, 오빠 항상 든든하게  함께하던 가족들 없이 내가 과연 혼자서  방학기간 동안  떨어져 지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마음이 떠나 있었고 여름 방학이 오길 손꼽아 기다렸다.


아직 중학생이기 때문에   부모님 친구분 댁인 부산에서  한 달을 지냈고 그다음 방학부터는 서울로 미술학원을 다니게 되었고 하숙과 고시원에서 생활을 했다. 내 인생의 첫 독립생활.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 아빠 없이 지내는 낯선 곳. 짧은 방학기간 동안 시간을 아끼기 위해 미술학원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머무는 곳을 정했고  적응할 시간적인 여유 없이 낯선 도시에서  빠르게 적응을 해야 했다.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 새로운 공간.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집을 떠나기 전까지  그저 자신감과 들뜬 마음이었는데 막상 새로운 곳에 혼자 오니 생각과는 너무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님과의 정서적 분리가 나에겐 조금  빨랐던 것일까? 결론적으로 나는 적응을 하지 못했다.   

학원이 끝나면 컴컴한 밤이 무서워 바로 집으로 뛰어왔다. 골목길에 접어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100미터 달리기를 했다. 불 꺼진 방에 손을 더듬어 불을 켜기 직전의 느낌이  생생히 기억난다.

방학 동안 잠시 머물다 가기 때문에 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방안은 텅 빈 울림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가면 짧은 몇 초간의 적막함이 공허함과 함께 어린 나의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

  불을 환히 켜놓고  창문과 방문을  잠겼는지 몇 번을 확인했다.  밖에서 조금만 소리가 나도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고 소리의 근원을 귀를 쫑긋 세워 찾아내고  잠잠해질 때까지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겁이 많은 뽀삐, 겁이 많은 나.


    방 안에서 매일 빨리 밝은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지금 생각나는  또 다른 기억의 장면중 하나는 집으로 들어가는 길 앞 공중전화로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그때는 핸드폰이 없었던 시절이라 공중전화로 연락을 했다.  마치 응답하라 1997 프로그램에서 서울로 상경한 배우가 부모님께 잘 지낸다고 전화하는 모습과 거의 장면이 흡사한 것 같다.

 잘 있냐는 수화기 너머의 엄마의 목소리에 눈물을 꾹 참고 너무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어냈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는데. 그리고 집으로 들어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혼자 있는  무섭고 싫어서  집으로 너무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렇게 나에게  기회를 주신 부모님께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말을 했었어도 되는데 말이다.


그 당시의  나는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 굉장히 서툴렀던 것 같다.  그저 마음속의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았다. 힘든 상황을 억지로 견디는 것이 최선인 줄 알았다. 치유되지 않은  경험의 감정들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의식보다  더 깊은 마음의  바닥에 켜켜이 쌓여 있는 게 아닐까. 그때 가족들에게  마음의 이야기를 했더라면  지금보단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을 보내고 난 후에 겨우 겨우  낯선 곳에 적응을 했지만  40세가  넘은 지금도  여전히 겁이 많고 어둠은 싫다.

.

그러고 보니 내가 자주 습관적을 하는 말이 있다.  친구나 가족과 함께 있다가도  혼자 남게 되는 상황이 되면 입버릇처럼   ‘나 혼자 두고 어디가?  같이 가 '라고 말을 한다.

혼자 있는 상황이  그 어릴 때 빈방에 남은 기억의 순간과  겹쳐진다.

나의 그런 모습을 감추고 아닌 척 괜찮은 척 쿨하고 당당한 척 살다가 치유되지 않는 감정의 조각들이  뽀삐를 통해서  들킨 것 같았다.


오늘 뽀삐가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나에게 혼자 집에 있기가 싫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옷장 속에 숨어 지내고 소리에 예민한, 단순히 겁이 많아서인 줄로만 알았던 뽀삐의 행동에서 비로소 하나둘씩 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두려웠을까. 나는 뽀삐에겐 너무 낯선 사람일 테고  16년간 살던 집은 바뀌었고 평생 곁에서 지켜주던 보호자도 갑자기 사라졌으니 뽀삐는  정말 얼마나 힘들었을까.

 뽀삐야  걱정 마 이제는 내가 너를 지켜줄게.

너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마치 내가 어릴 적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그때의 기억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만 같았다.

옷방속에 숨어지내는 뽀삐. 무서워하지마. 이제는 내가 지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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