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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 May 18. 2022

밥 주는 사람

너와 나의 거리

옷장 밑에 숨어 눈치만 보는 뽀삐/ watercolor



오늘도 어김없이 꽁꽁 숨어서  숨바꼭질을 하는 뽀삐는 내 눈치만 보고 있다.

옷장에 숨어 머리만 빼꼼 내민 채 나올까 말까를 고민한다. 거실에 인기척이 잠시 사라지면 스윽 나와서  물을 마신다. 혀는 물을 마시지만 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느라 바쁘다. 나랑 눈이라도 마주치면 다시 후다닥  피해 옷방으로 숨어버린다.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하면 옷 장 밑에서 으르렁거리며 싫다는 표현을 한다.


 시댁에서 봤을 땐 나한테 먼저 다가와 애교도 부리고 친근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 집으로 온 후부터는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둘의 사이가  더 거리가 생겨버렸다. 갑자기 바뀐 환경과 달라진 보호자로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럴 거라  생각도 들지만 사실 뽀삐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만져 보는 것은 아직까진 꿈도 꾸진 않고 도망가지 않고 가까이만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 그런 날이 오려나.


근데 하루에 딱 두 번 뽀삐가 나에게 먼저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바로 밥을 먹을 때!

정확하게 말하면 사실 나에게 오는 건 아니고  목적은 밥. 밥을 먹기 위해 나에게 오는 것이다.


뽀삐가 밥을 먹는 시간은 하루에 두 번. 아침 7시,  저녁 7시 즈음이다.  옷방에서 숨어 자다가 아침이 되면 우리가 자는 안방으로 걸어와 침대 아래에서 짖기 시작한다.  잠결에 깨서 시계를 보면, 6시 50분, 7시, 7시 5분. 오차범위가 10분 내외다. 뽀삐의 배꼽시계는 귀신같이 거의 정확해서 매번 놀랍다. 내가  침대에서 내려올 때까지 계속 '왕왕'거리며  짖는다. (밥을 달라고 짖을 때는 소리가 다른 것도 신기하다).   

일어난 걸 확인하면  주방 쪽  밥그릇 앞으로 달려간다.  밥그릇 앞에 딱 서서 반짝거리는 동그란 눈으로  밥을 빨리 달라는 눈빛을 마구 보낸다.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쓰다듬으려 하면 뽀삐는 또다시 왈! 하고 만지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다.

만지진 말고 밥은 줘! 이런 뜻인가.?  정말 뽀삐의 마음을 여전히 알 수 없다. 쳇! 평상시는 날  찾지도 않으면서 먹을 때만 친한 척하는 노견 할아버지의 행동이 얄밉기도 하다.

저녁에 퇴근 후 집에 오면 문이 열림과 동시에  뽀삐는 방에서 나와  밥그릇 앞에서 나를 찾는다. 왕왕! 빨리 달라고 재촉하듯 짖는다.  그래서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허둥지둥 뽀삐의 밥을 챙겨준다. 하루에 두 번을 이렇게 밥과의 전쟁을 한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쌩하고 방에 다시 들어가 버린다.

내가 일어난걸 확인하면 밥그릇 앞에서 기다린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뽀삐는 간식도 사료도 거부하고 거의 하루 종일  쫄쫄 굶었다.

노견이라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건강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이 되어 이것저것 먹여보러 도전했는데 입을 쉽게 열지 않았다.  

 밥그릇에 사료를 놔두면 스스로  알아서 먹는 강아지도 있겠지만,   뽀삐는 나이가 많아서 슬프게도 이빨이 다 빠져 아래에 작은 송곳니 하나만 남아 있는 상태다.

  어차피  딱딱한 사료를 줘도 이빨이 없어서 씹지를 못해 혼자서  먹을 수 없는 현실이다.  모든 음식을 혀로 핥아서 먹거나 삼켜서 먹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사료를 뜨거운 물에 불려서 으깬 후에야 뽀삐는 겨우 먹을 수 있다.

불린 사료를 주면  냄새만 킁킁 맡고 먹지 않고 먹을까 말까를 고민하며 밀당만 했다. 하도 먹지 않아   닭고기와 쇠고기를  삶아서 으깬 후 먹여보기로 했다.  남편이 뽀삐를 안은 채로 입에다 직접 넣어 먹여 주었더니   배가 많이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었다.

 강아지 사료를 주면  먹지 않고 고기 종류는 잘 먹으니 이걸 어쩐담. 그렇다고 매번 그렇게 먹일 수는 없으니 처음에 고기로 유인해서 입에 넣어준 후  사료와 고기를 섞은걸 먹였다.  고기인 줄 알고 사료가 섞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제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특히 방금 불린 사료와 방금 삶은 고기를 섞인 밥을 먹을 때가 제일 잘 먹는 날이다.


남편이 먹이다가 내가 입에 넣어주려 하면 얼굴을 휙 돌리거나 도망을 가버려서  남편이 밥을 먹일 땐 나는 숨어 있거나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일단은 유난스러워도 먹이는 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밥 먹는 걸로 우리의 속을 태웠던 뽀삐는 고기 때문인지 몰라도 남편이 안고 먹이지 않아도 밥그릇에 있는 밥을 스스로 먹게 되어  우린 걱정을  한시름 놓게 되었다.


특히 내가 곁에 있으면 절대 밥을 먹지 않았던 뽀삐가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기 위해 나를 찾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변화인지 모른다. 신기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여전히 밥시간을 제외하곤 나와 매일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뽀삐에게 밥 주는 사람으로 기억이 되었지만 하루 중 유일하게 뽀삐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고 1:1로  마주하는 시간이니 오히려 내가 밥 주는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이렇게라도 나에게  조심스럽게 마음을 조금씩  열어준 뽀삐가  참 고맙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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