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안시크릿 #2] 소련과 독일, 전쟁과 이념 이야기
지정학적 시각에서 러시아가 보유한 뎁스와 대외 전략을 분석합니다.
고대 '프루센 족'이 살던 발트해 근처 땅은
13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십자군 파병, 이후 프로이센 공국과 왕국을 거쳐 독일 제국(1871)의 영토가 됩니다. 이교도의 땅을 점령한 십자군은 이곳을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라고 불렀죠.
East Prussia
Königsberg
독일 제국 수립을 주도한 프로이센 왕국은 자연스럽게 제국의 심장이 됩니다.
프로이센의 대표 도시 쾨니히스베르크는 게르만 군국주의의 상징이자 민족주의 색채가 가장 진한 도시로 담장을 높이면서 요새화됩니다. 독일의 자부심이자 동부 전선 방어의 최일선이 된 거죠.
하늘을 찌르던 쾨니히스베르크의 자존감은 2차 대전으로 무너집니다.
소련 붉은 군대는 '동프로이센 공세(East Prussian offensive)'를 시작해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하고 마침내 베를린에까지 도달합니다. 이후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전쟁도 끝났죠.
이렇게 독일의 자부심이던 쾨니히스베르크는 소련 땅, 칼리닌그라드가 됩니다.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한 소련은 그곳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려 합니다.
건축, 문화, 생활양식, 사람까지. 독일 색채가 가장 강한 곳이었던 만큼 도시 철거, 재건에 힘을 쏟았죠. 거기서 살아남은 것은 단 하나, 철학자 칸트의 무덤(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입니다.
소련은 왜 칸트를 보존했을까요?
게르만의 자랑이자 자신들의 이념과 상반되는 그를 왜 남겨둔 걸까요? 소련과 독일, 무덤에 얽힌 이야기를 해봅니다.
서양 철학의 근간을 이룬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그는 프로이센 왕국이 한창이던 1742년,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납니다. 프리드리히 3세가 집권하던 시기였죠.
그는 태어나서 생을 마칠 때까지 동프로이센 땅을 떠나지 않습니다.
서양 철학의 근간이 되는 인식론, 윤리학, 종교철학. 거기서 비롯된 <실천이성비판>, <순수이성비판>, 그리고 <영구평화론>이 모두 쾨니히스베르크의 하늘 아래서 태어난 셈이죠.
한 지역에서 평생을 사유하며 우주를 그려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는데요.
칸트는 오후 4시만 되면 어김없이 산책을 했는데 그 덕분에 쾨니히스베르크 주민들은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췄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루틴이 아주 일정한 사람이었다는 건데 그 정도로 자기 사는 곳이 좋았다는 뜻은 아닐지 짐작해 봅니다.
칸트의 사유는 총과 이념을 넘어섭니다. 앞서 언급한 2차 대전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하는데요.
1945년,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한 소련은 민족 문화, 건축, 그리고 생활상까지. 이 지역에 뿌리 박힌 독일 정신을 철저하게 빼냅니다. 주목할 대목은 그 와중에도 칸트가 살아남았다는 점입니다.
소련은 쾨니히스베르크 철거, 재건 사업을 펼쳤고 거기에는 칸트의 묘지 지역도 포함됐다고 하는데요.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 러시아인의 편지로 그 노선이 바뀝니다. 1947년 초, 소련 정부의 공식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Izvestia) 편집국에 한 편지가 도착하는데요. 편지 발신자는 칸트 무덤이 철거될 것임을 알리면서 "독일 고전 관념주의의 창시자 칸트의 무덤을 보존하자"라고 제안합니다.
이 내용은 소련 연방 정부 문화위원회에 전달됐고, 소련은 쾨니히스베르크 주 행정부에 무덤 보호를 지시하죠.
(편지가 결정적 역할을 한 건 맞지만)
소련 정부로서도 칸트 철학의 보편적 가치를 인정했다고 봅니다.
비록 본인들의 이념과는 상반된 것이었지만, 서양 철학의 근간이자 인류의 보편적 유산으로서 말이죠. 소련으로서도 정치적, 실용적 득실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죠.
사실 점령자 소련에게 있어 이만한 '문화적 전리품'은 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이후 러시아는 칸트 관련 행사를 독일과 공동 개최하기도 합니다. 칸트가 우리의 유산이기도 하다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말입니다. 칸트라는 궁극의 콘텐츠를 기민하게 자기 선전에 활용한 셈입니다.
점령은 했지만, 세계 공공재로서의 가치는 지킨다는 정당성과 명분도 생각했을 겁니다.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연합군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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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상엽 ⓒ 3POINTSNEWS.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