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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무원 덕림씨 Jan 02. 2021

인간의 삶이 시련이라고? 웃긴다.

의미를 찾을 때 맞는 말이다.

네이버에 ‘조선’을 검색하면 주요 인물 5명이 나온다. 그중에 주요 공직자 2명이 나오는데 이순신 장군정약용 선이다. 그래서 공직 생활하는 동안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읽고 또 읽었다. 23전 23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 공직자들의 청렴의 표상이 된 목민심서를 남긴 정약용 선생! 공직의 길이 얼마나 험난 했던가? 이순신 장군은 주변의 모함으로 사형까지 처형될 위기도 있었고, 정약용 선생은 18년간 1000리 길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어쩌면 그렇게 힘든 모함이나 고난이 닥치면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텐데 어떻게 감내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늘 궁금했다. 그래서 심리학적으로 어떤 상태였기에 가능할까? 고민하다가 읽은 책이 바로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내용을 정리해 본다.   

  



이 책은 독일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정신과 의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알게 된 인간의 새로운 모습 13가지에 대해 기술한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0년 독일 나치의 히틀러는 유대인을 완전히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강제로 수용소에 모아 일을 할 수 없는 자와 일을 할 수 있는 자로 구분했다. 일을 할 수 없는 자는 일명 가스실로 불리는 대량 학살장에서 죽였다. 간신히 살아남아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끝없는 노역에 시달렸다. 온종일 먹지도 못한 채 참호를 팠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비실대는 순간 가스실에 조용히 끌려갔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빅터프랭클은 4번에 걸쳐 수용소를 옮기면서도 살아남았다. 어느 날 저녁, 한 순간 ‘내가 만일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사람들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날 이후 아무리 간수가 힘들게 해도 감내할 수 있었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생활상을 모두 정리했고, 그 경험을 통해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심리 상태와 의지에 대해 깨달은 것들을 학문으로 승화시켰다. 부모, 형제, 아내가 강제수용소에서 모두 죽고,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굶주림과 추위,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바로 ‘왜(의미)를 알면 시련은 값진 것이다’라는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나의 시련은 없었을까? 잠시 되돌아본다.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전용도서관 ‘기적의 도서관’ 사업을 추진할 때 사기꾼으로 지명되기도 했고, 지방자치시대 주민참여가 중요하다면서 동사무소를 주민자치센터로 변화시키려다 ‘동사무소를 모텔 만드냐’고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순천만 습지를 보전하기 위해 경관보전지구 지정과 전봇대 제거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돌팔매질, 순천만 국가정원을 조성하면서 겪었던 조사와 감사, 소송에 휘말리면서 ‘감사원장은 왜 나만 따라다니냐’면서 눈물의 편지를 썼던 일 등... 순식간에 주마등처럼 흐른다.      


그때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정약용 선생님의 ‘목민심서’는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영화 명량을 보기 전에는 장군께서 12척의 배로 300척의 왜선을 당당히 이겨보겠다고 전쟁터에 나간 줄 알았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아들 이호가 아버지에게 말한다. ‘임금도 아버지를 죽이려 했고, 장수들도 아버지를 다 따르지 않은 것 같다. 주민들도 모두 자기 살 궁리만 하는데 왜 아버지는 전쟁터에 또 가시렵니까?’ 하면서 간곡히 가지 말기를 부탁한다. 그러나 장군은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忠)이다. 충은 곧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다면서 백성을 위해 나가야 한다.’고 아들을 설득했다.   

   

정약용 선생은 왜 목민심서를 썼을까? 그 배경이 있다. 강진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관리들을 보고 놀랐다. ‘맹수들은 배가 부르면 동물을 더 이상 잡아먹지 않는데, 왜 관리들은 배가 불러도 한없이 농민을 착취하는지 답답하다.’면서 형 정약전에게 편지를 보낸 후 목민심서를 썼다. 이렇듯 이순신 장군과 정약용 선생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가 분명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어떠했을까?  바로 왜(의미)가 확실한 일은 어떤 고난이 있어도 버틸 수 있었다. 끝까지 설득할 수 있었다. 사기꾼으로 몰려도, 감내할 수 없는 동료들의 험담에도, 민원인으로부터 린치와 돌팔매질을 당해도, 조사와 감사, 소송을 당해도 떳떳이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한 일이 후세를 위해 해야 할 일이라면 내 몸에 상처가 난들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다.’는 왜(의미)를 가슴에 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십 번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다. 날이 새면 험담이나 모함하는 사람을 찾아서 원수를 꼭 갚고야 말겠다면서 잠들기도 했다. 새벽이 되면 ‘그 시간에 일이나 더 하자’고 마음을 바꾸기도 수십 번... 시련의 깊이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 시련으로부터 겪는 고통도 다르다.      


시련이 얼마나 깊은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 과정이 힘들더라도 감내할 수 있었다. 사람이 자기 삶에 더욱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는 바로 시련을 받아들일 때이다. 시련을 겪었다고 바로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언젠가는 그때를 돌아보며 자기가 그 모든 시련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날이 올 것이다. 결국 시련은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해 준다. 시련 그 자체가 인간의 삶이니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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