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공직자의 일 _측은지심이 필요할때
#1 (최근일) 일산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한다. 코로나 시대에 9시 마감이라 영업을 마치고 마지막 손님을 나가라 하고 설거지를 한다. 9시 13분경 공무원이 들어와서 영업시간을 넘겼다고 지적을 받았다. 그 일로 과태료 150만 원을 부과당했다. 구청과 시청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를 어긴 업주는 재난지원금을 지원하지 말라'는 국무총리 지시에 재난 지원금 100만 원도 받지 못했다. 억울하다.
#2 (20년 전 기억) 노래방주인이 노래방에서 술을 먹다가 경찰에 적발되어 영업정지를 요구하는 결재가 올라왔다.(당시 나는 과장으로서 규정상 노래방에 술이 반입되면 영업 정지하게 되어있음) 아무리 생각해도 '노래방에서 국물에 소주?' 이상했다. 재조사를 했더니 '오랜만에 서울에 사는 동서가 방문하여 물고기를 잡아 국물에 소주 한잔 하는데 경찰이 와서 찰칵~ 하더니 신고한 사건이다.' 재조사 문서를 첨부하여 영업정지를 하지 않았다. 노래방주인은 당연한 일인데도 눈물로 감사를 표시했다. 반면에 담당 직원은 불만이 많았다. 경찰에서 이첩한 사건이라 훗날, 반드시 감사대상이라는 것이다. 20년이 지나도 이상 없다.
사례 1은 페북에 올라온 글이다. 한 시민이 억울함을 글로 표현한 것이다. '공직자들의 권력이란 생존이 어려운 분들을 살피고, 지원해야 하는데 이런 상황이 되면 더 우위의 자리에서 서민들을 을로 취급하며 단속한다. 민생이 우선이고 민중을 살피는 것이 촛불 정부여야 하는데 권력과 민중은 갑과 을의 관계가 되어 민중은 늘 굽신거려야 하느냐?'는 하소연의 글이다. 민중을 위한 거룩한 권력을 행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다.
나의 페친이신 목사님은 막심 고리키(1868~1936)의 <가난한 사람들>을 읽으면서 이런 상상을 했다 한다. '가난은 가엾음이다. 외투가 없는 사람들이 생살로 살아가는 아픈 소리가 가난이다. 고리키가 지향했던 사회주의가 소련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권력을 가진 기회주의자들이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정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라면서 최근 4인 이상 모여서 일하는 당신들이 4인 이상 모이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민중의 삶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당신들은 공공의 근무자가 아니라 사적인 모임을 하는 자라고...
사례 2는 공직생활 중에 있었던 일로서 사례 1과 너무 비슷한 기억이 되살아 나 옮겨 보았다. 최근 공공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가치가 곤두박이치는 느낌이다. 코로나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은 헌신적인 공직자들을 보면서 한없이 감사하기도 했다. 그것도 잠시 LH사건을 보면서 고양이 앞에 생선을 맡긴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는 하소연으로 분풀이를 대신하는 것 같다.
갑자기 2012년 공직자 최초로 TED 강의를 할 때 시작과 마무리 말이 귓전을 맴돈다.
시작하면서 한말은 '나는 철밥통이라는 말이 싫어 혁신적으로 일했습니다. 결과는 조사와 감사만 이어졌습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내가 한 일들이 시민을 위해 국민을 위해 한일이라면 당당히 받겠습니다.' 했다. 마지막에 한 말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너만 일하냐?' 비아냥하기도 하고, '네가 한 일 대단하다.' '책으로 한번 써봐라' 하기도 합니다. 만일, 책을 쓴다면 '내가 눈물을 많이 흘릴수록 시민들은 행복해했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을 '나의 눈물 시민행복'이라 쓸 것입니다."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당당했다.
최명희 작가의 말을 새기면서 살고 싶다.
'아름다운 조각품을 보면서, 그 아름다운 조각품이 태어나기 위해 떨어져 나간 돌이나 쇠의 아름답고 숭고한 희생을 우러르며 가슴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