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토와 불쾌감속에서 자라난 숨의 사회적 의미
데카르트가 인간을 표현할 때 “고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나는 내가 존재하는 것을 생각한다.”일 것이다. 라틴어로 COGITO는 타동사로 “~생각하다”, “생각을 품다”, “상상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재는 끊임없이 자신을 실존(살아있음)을 묻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면 존재란 무엇인가? 우선 한자어로 살펴보자면, 존재(存在)란 현실에 ‘있다(在’)이다. 현 세상에 티어남과 동시에 ‘발생된 존재’이다. 살아있을 존(存)과 있을 재(在)는 한자 구성으로 보면 �(왼 좌) + 丨(뚫을 곤)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고 子(사람 자)와 土(흙 토)를 차이점으로 보여준다. 이를 종합적으로 보자면, 존재(存在)라는 글자는 ‘세상을 뚫고 나와 흙 위에 서 있는 사람’이다.
이 한자어 풀이를 라틴어 글자 숨(SUM)과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나온다. 숨(SUM)은 자동사로 표현된 “있다” 혹은 “발생하다”라는 동사인데 데카르트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썼다. ‘있음’이라는 단어는 스스로 존재를 만든다. ‘그저 있음‘은 우리가 지구상에 사는 생물이기 때문에 ’그저 있음‘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 지점이 한자어 재(在)와 똑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동물이지만 사회를 이루고 사는 존재라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가 됨’ 혹은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가 됨’이라는 이차적인 것인 큰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바로 한자어 존(存)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매슬로우(Abraham Maslow) 역시 5가지 욕구 중 “소속의 욕구”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이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가 됨’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가 됨’이라는 ‘그저 있음’이후의 자신 존재에 대한 의무부여의 과정을 겪게 된다. 만약 이 ‘존재에 대한 의무부여’가 잘 된 경우, 그 인간관계는 좋은 관계로 남는다. 그러나 상대방에 의해 ‘자신 존재에 대한 의무부여’가 잘 되지 않은 경우, 그 인간관계는 실망으로 끝나게 된다. 보통의 경우, 사회에 속한 구성원은 비록 어떤 관계가 실망스런 인간관계로 끝이 나더라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형식적인 관계는 유지한다. 단지 마음이 떠날 뿐이다. 그 마음이 떠난 상황을 되새겨보면, 자신의 존재를 충분히 배려하지 않은 상대방에 대한 불쾌감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 자연히 ‘존재’한다는 일차적인 의미를 상대방이 ‘인식적으로’ 자신을 부정했다는 불쾌감이 고개를 든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런 ‘존재에 대한 부조리’ 즉 코기토라는 자기부정과 자신을 인식면에서 부정했다는 불쾌감을 느끼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
우선 ‘자기부정’의 철학적 전통에 대해서 살펴보자. ‘자기부정’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헤겔, 레비나스, 데리다, 주디스 버틀러에서 계보를 타고 나타난다. 이들은 ‘자기부정’이 개인에게 해악을 끼치기보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윤리성에 대한 반성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헤겔은 무리하게 도덕적으로 자신을 옭아매면 반작용이 생긴다고 보았다. 레비나스는 ‘자기부정’을 통해 타자와 만나고 타자와 ‘얼굴과 얼굴이 마주함’을 강조한다. 데리다는 중심부와 주변부라는 개념에서 기존의 지식체계를 가진 자신의 지식 스키마의 변화 필요성에 대해 논한다. 주디스 버틀러는 기존 사회의 윤리관에 얽매인 ‘자기부정’을 통해 타자에게 전이, 역전이되는 과정을 타자와 연결되는 감정적 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이로 인해 얻게 되는 타자와의 ‘관계성’을 중요시 여긴다.
다른 한편, 프로이드에 따르자면, 불쾌감이란 감정은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드러내는 날 것의 감정이다. 기저귀에 대소변을 누거나 목마르거나 배고프거나 아프거나하면 불쾌한 감정이 먼저 떠오른다. 이것은 생존과 직결된 감정이다. 만약 아이가 불쾌감을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느끼지 못한다면, 아이 양육자가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없다.
비록 ‘자기부정과 불쾌감’으로 자기 스스로는 자괴감에 빠질 수 있고 그 마음 상태에 대한 반동이 생겨나 더 이기적이 될 수 있지만, ‘자기부정과 불쾌감’이라는 새로운 단계의 자신을 만남으로서 평소 보지 못한 내 자신을 보게 된다. 내 자신을 넘어서는 행위는 나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타자와 나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판단하게 해줄 수 있다. 내 중심으로 보다보면 타자가 보이지 않았던 그런 지점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이런 경험으로 버틀러가 말하는 전이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전이현상을 겪었던 사람들은 타자의 입장에 서보게 된다. 그 전에는 자신만 바라보던 내 자신이 이제 타자의 입장이 되어 본다. 이런 엄청나게 큰 변화의 시초는 가장 철학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자기부정과 불쾌감’이다.
결국 존재(SUM)은 코기토(COGITO)와 불쾌감에 의해 의미를 갖게 된다.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는 자기를 의식하는 내 자신이 바로 숨(SUM)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또한 불쾌감 역시 행복하지 못한 자신을 타인과 맞춰가려고 눈을 맞추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코기토와 불쾌감을 제대로 경험한 사람은 이 세상에 타인들과 함께일 수 있다. 피상적으로 세상에서 살지 않고 진짜 사람으로 세상을 산다면, 흙에서 발을 붙이고 인간과 부딪히며 자기 자신을 깨고 더 큰 자신으로 나아가면서 남과 함께 ‘인간 사이에서 인간(人間)’을 완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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