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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래 Aug 25. 2023

장화 신고 패션쇼


https://brunch.co.kr/@ce3179a175d043c/457



8월 초에 전국적으로 태풍이 불었다. 태풍이 우리나라를 통과하여 북쪽으로 물러나다 보니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내렸다. 이재민도 많이 생겼고 농작물도 피해를 많이 보았다. 비가 많이 내려서 8월에는 비가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처서에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그다음 날 오전까지 비가 내렸다. 남쪽은 저녁까지 세찬 비가 내린다고 했다. 자연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처소에 비가 내리니 조금 원망스러웠다.


8월 중순 태풍이 지나간 다음에 장화를 주문했다. 장화는 며칠 후에 도착하였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남편이 주문한 장화를 반납하고 다시 주문해 준 장화여서 많이 무겁지 않으면 이번에는 그냥 신으려고 했다. 베이지색도 마음에 들었고,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아서 길이도 마음에 들었다. 주문한 장화는 신발장에 모셔놓고 언제 신을 수 있을까 기다렸다.


어린아이처럼 자꾸 신발장을 열어보았다. 그러다가 어떤 옷에 어울릴까 신어 보았다. 반바지도 입어보고, 원피스도 입어보았다. 바지를 입고 장화 속에도 넣어 보았다. 혼자서 장화 신고 패션쇼를 열었다. 관객은 없었지만, 왜 이리 재미있는지 장화 신고 거실 한 바퀴를 돌기도 하고 워킹도 하며 놀았다.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러고 노는지 누가 보면 참 한심하다고 할 것 같다. 그래도 즐겁기만 하였다. 아무도 없어서 마음 놓고 패션쇼를 하다 보니 반바지나 조금 짧은 원피스가 가장 잘 어울렸다. 다음에 비가 오면 반바지에 장화를 신고 나가보고 싶었다.


내릴 것 같지 않았는데 비가 8월 23일과 24일에 내렸다. 23일은 개학 날이라 필요한 짐을 가지고 가야 해서 승용차로 출근하였다.

24일 아침에 남편이 출근하며

"오늘 비 오는데 장화 한 번 신어보지."

라고 말하며 출근하였다.

남편도 장화를 사주고 어서 신어보길 기다렸나 보다. 그 말에 오늘은 장화 신고 출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지는 않았지만, 때는 이때다 하고 장화를 신고 출근하였다. 장화에는 반바지가 가장 잘 어울렸지만, 반바지 입고 출근할 수는 없어서 원피스를 입었다. 출근길에 장화는 신지만 학교에 가면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어야 해서 원피스를 입었다. 원피스가 조금 길어서 폼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신나게 걸어갔다. 물 웅덩이도 비켜가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비 오는 날 장화가 좋긴 했다.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볍고 신났다.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는데 반대편에서 젊은 아가씨가 나랑 똑같은 장화를 신고 걸어오고 있었다. 모양도 색상도 똑같았다. 바지를 장화에 넣고 신었다. 안 보는 척하다가 나도 몰래 쳐다보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신은 모습을 보니 정말 괜찮아 보였다. 젊은 분도 신는 장화라고 생각하니 주문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까지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데 불편하지 않았다.


비가 오전에만 내리고 그쳤다. 퇴근하려고 나오니 여전히 더웠다. 습하기에 더 덥게 느껴졌다. 터벅터벅 걸어 전철을 타러 가는데 발이 무거웠다. 아침에는 신나서 가볍게 걸었는데 마음이 요상하다. 장화 끝부분이 종아리를 때리는 것 같았다. 전철에서 내려 저녁에 먹을 반찬거리를 사러 집 앞 슈퍼에 들러서 몇 가지를 사서 들고 걸어가는데 발걸음이 무겁다. 걸음이 잘 걸어지지 않았다. 하필 우리 집은 아파트 제일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서 약간의 오르막길도 걸어가야 한다. 가벼운 샌들이 생각났다.


장화는 비가 많이 내리는 날만 신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발이 더우니 전체적으로 덥게 느껴졌다. 아침에는 무겁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비가 내리지 않으니 무겁게 느껴졌다. 길지 않은 퇴근길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집에 오자마자 장화를 벗고 에어컨을 틀고 소파에 앉아서 쉬었다. 장화는 아무나 신는 게 아닌가 보다. 생각해 보니 참 우스웠다. 비가 쏟아지지도 않는데 폼 잡고 장화 신고 출근했던 내가 꼭 어린아이 같다. 새 옷을 사면 입어보고 싶듯이 새 신을 사니 신어보고 싶었다.


나는 새로운 물건을 사면 남아있는 것을 다 사용한 후에 새것을 사용한다. 떨어지기 전에 미리 사는 편이라 새로 산 물건은 오래 있어야 사용하게 된다. 화장품도, 생필품도 그렇다. 그런데 옷이나 구두는 꼭 사자마자 먼저 착용한다. 장화를 사놓고 보니 신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문 앞에 두고 매일 바라만 보다가 비가 내리니 이때다 싶었다. 오늘 퇴근하며 조금 고생했지만, 새로 산 장화를 신을 수 있어서 좋았다. 가을에는 비가 자주 내리지 않겠지만, 이제 신발장에 두었다가 비가 많이 내리면 그때 신어야겠다. 장화가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다.


비오는 날 장화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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