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신이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박태준 포스코 창업주가 ‘한국에 제철소는 불가능하다’는 세간의 비웃음을 이겨내며, 포항제철 1기 준공을 앞두고 임직원들에게 남긴 말이다. 그는 산업화의 기적을 인간의 의지로 증명해냈다.
세계를 뒤흔든 리더의 생애
박태준 포스코 창업주는 1927년 경상북도 영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가난 속에서 자랐고,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를 다녔다. 청년기에는 자주 독서와 체육을 통해 체력을 기르며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성실한 학생이었다.
광복 이후 박 회장은 서울대 문리대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1기로 입학했고, 6·25 전쟁 당시에는 야전사령부 참모로 활약하며 장교로 전역했다. 이후 국방부에서 군수담당으로 일하다가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을 계기로 정치 및 경제 산업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산업화가 절실하던 1960년대, 박 대통령은 그에게 ‘불가능하다’는 제철소 건립을 맡긴다. “철이 없으면 산업도 없다”는 국가적 사명을 안고, 1968년 그는 제철소 건설의 책임자로 포항에 발을 디딘다.
박 회장은 당시만 해도 맨손뿐이던 땅에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을 세우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해외 차관 유치, 일본과의 협상, 부지 확보, 기술 인력 양성까지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며, 국내 최초의 일관제철소를 완공해냈다. 1973년 포항제철 1기 준공은 한국 산업사에서 기적이라 불릴 만한 사건이었다. 포스코는 이후 2기, 3기, 4기를 거치며 세계적인 철강회사로 도약했고, 광양제철소 설립까지 주도하며 세계 철강 시장에서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박 회장은 ‘자본도 기술도 없던’ 대한민국에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산업화는 희생과 헌신의 결과물”이라며 직원들과 숙식하며 공장을 함께 짓고, 안전모를 벗지 않고 현장을 누비는 CEO였다. 그는 공정·생산·기술·인재를 하나의 사슬로 묶어, 단단한 조직문화를 만들었고, 평생 '부정부패 금지', '근검절약', '무노조'라는 경영 3원칙을 고수했다.
1980년대 후반, 포스코는 세계 최고의 생산성·품질·수익성을 갖춘 철강기업이 됐다. 수출 1위 기업이자, 무차입 경영의 상징으로 불렸고, 국가 기간산업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았다. 박 회장은 CEO로서 20년간 포스코를 이끌며, 단 한 번도 부실 경영이나 윤리적 논란에 휘말리지 않았다.
1993년, 포스코 회장에서 물러난 그는 이후 정계에 입문해 국회의장과 총리를 역임하며 국가 정책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 속에서 포스코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2011년 12월, 향년 84세로 타계했으며, 포스코 창립 이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제철소 시무식의 빈자리는 그날 이후 비어 있다.
리더의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
박 회장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점은 1968년 포항제철소 건설 책임을 맡은 순간이다. 당시 한국은 철강 불모지였다. 기술도, 자본도, 경험도 없는 나라가 제철소를 만든다는 건 국내외 모두가 비웃는 일이었다. 세계은행은 “한국엔 제철소가 필요 없다”고 못 박았고, 국내에서는 “중소기업부터 키워야 한다”는 비판이 거셌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제철보국’을 내세우며 박 회장에게 중책을 맡겼다.
박 회장은 군인 출신답게 이 임무를 ‘작전’으로 여겼다. 그는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기술과 차관을 유치했고, 미국과의 외교 채널을 열어 한국의 산업화 당위성을 알렸다. 일본의 기술지원을 이끌어낸 것은 외교적으로도 민감한 사안이었지만, 박 회장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논란을 무릅썼다. 그는 스스로를 “하수도 공무원”이라 부르며 현장에 상주했고, 직원들과 철야작업을 함께하며 사기를 끌어올렸다.
공사 도중 장마와 태풍으로 공장이 통째로 무너지거나, 용광로 폭발 사고 등 치명적인 위기도 많았다. 자금이 끊길 위기에 처했을 때는 정부 관계자를 붙잡고 울다시피 호소했고, 자재 부족으로 외국산 고철을 들여와서라도 일정을 지켰다. 그는 “기술이 없으면 사 오고, 사람이 없으면 키우면 된다. 핑계는 없다”고 말했다. 공장 설계부터 회계, 용광로 공정까지 모든 것을 직접 챙기며, 그는 사실상 한 나라의 산업학교장이었다.
1973년 드디어 포항제철 1기가 가동되던 날, 국내 철강 자급률은 0%에서 30%로 치솟았고, 수출의 길도 열렸다. 그가 심은 ‘철강의 씨앗’은 이후 조선, 자동차, 기계산업의 성장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국가 성장과 산업구조 재편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고, 이 과정에서 ‘불가능은 없다’는 교훈을 전 국민에게 심어주었다.
이 터닝 포인트는 단지 철강공장 하나를 지은 사건이 아니다. 산업화를 자력으로 이뤄낸 최초의 사례이며, 지도자가 한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증명한 순간이었다. 박 회장의 선택과 리더십은 한국형 기업가 정신의 전형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CEO들이 그를 '현장에서 뛰는 경영자'의 표본으로 삼게 되었다.
거인의 어깨와 나란히 하려면
박태준 회장에게서 배워야 할 가장 핵심적인 자질은 ‘현장 중심의 실행력’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위에서 시켜서’ 일하지 않았다. 모든 프로젝트는 현장에서 시작됐고, 보고서가 아닌 진흙탕 위에서 답을 찾았다. 철강이라는 산업은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수많은 공정과 사람, 리스크가 얽힌 복합체다. 그걸 통제하려면 책상이 아니라 현장에 있어야 했다.
이 실행력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디지털 시대에도 결국 가장 강한 조직은 ‘현장 감각’을 잃지 않는 조직이다. 리더는 숫자와 그래프만 볼 것이 아니라, 고객과 직원, 협력사의 목소리를 ‘현장’에서 직접 들어야 한다. 박 회장은 “현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용광로 앞에서, 작업장 옆에서, 숙소에서 문제를 해결했다.
독자도 자신의 삶이나 비즈니스에서 현장을 중시해보자. 작은 가게든 큰 조직이든, 일의 정답은 서류에 없다. 고객과 마주 앉는 자리, 직원이 머무는 휴게실, 제품이 만들어지는 공정 속에 답이 있다. 박 회장이 철강으로 한국을 바꾼 것처럼, 독자도 ‘자기 현장’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면, 어떤 산업에서도 리더가 될 수 있다.
리더도 사람이다?!
어느 날 박 회장이 제철소를 돌며 점심시간에 작업자들과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자, 직원들이 긴장하며 “회장님, 오늘 반찬이 김치 하나뿐입니다”라고 했다. 박 회장은 한 숟가락 먹고는 “그래도 이 김치, 철 맛이 나네!”라며 웃었고, 그 말에 식당 전체가 웃음바다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