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나면 빠꾸"
일을 쉬면 제일 괴로운 일은
1. 수익이 끊긴다는 것
2. 그 기약이 없다는 것
3. 이직 준비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
4. 뒤쳐진다는 것
일 것이다.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뒤쳐진다는 것.
쉬면서도 계속 스트레스를 받으니 닥치는 대로 공고를 탐색했다.
'나는 어떤 기획자일까'
'하던 일이 아니면 어디로 가야 하나'
'더 이상 시행착오를 하지 않으려면 회사의 어떤 것을 알아보아야 하나'
이 시점에는 쉽게 지원을 할 수도, 오퍼도 무조건 수락할 수도 없었다.
트레드밀에서 가만히 있으면 뒤로 떨어지듯,
그냥 그렇게 가만히 뒤처지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기획자가 실무경력 7년 이상이 되면 '시니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회사와 업계마다 시니어 기획자 또는 PM으로 불리는 시기는 다를 수 있지만,
통상 7년, 늦어도 10년 이상의 경력이 있으면 시니어로 불린다.
시니어 기획자가 되고 나면 제법 오퍼가 들어온다.
채용사이트에 이력서를 오픈하거나, 헤드헌터를 통해 오퍼를 받을 수 있다.
그러다가 이름이 좀 알려지면 이력서를 오픈하지 않아도 오퍼를 받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업계의 분위기나, 채용트렌드를 파악한다.
쉬는 동안에도 오퍼를 여러 곳에서 받기는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정말 희한한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이나,
불안정안 사업을 하는 곳들이 많았다.
에이전시 경력이 생기고 났으니,
에이전시에서 단순 기획을 하는 자리도 제안이 왔다.
그렇게 여러 곳에서 오퍼를 받다 보니
기획자에게도 프리랜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보였다.
일정 기간을 두고 고용 계약을 하고,
기획팀 빌딩, 문서, 정책에 대한
일종의 컨설팅을 하는 것이다.
기간이 종료되면 성과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되거나
홀가분하게 떠나도 된다.
나는 프리랜서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마치 회사에 종속되지 않은 채로 일을 하고,
일이 끝나면 툭 털어버릴 수 있고,
시간에 대한 압박감이 적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월급은 꼬박꼬박 들어오는.
들어온 오퍼 중 IT서비스를 신규 론칭하려는 제조업의 프리랜서직을 수락했다.
이곳도 조건은 동일했다.
1. 기획팀, 개발팀 구성
2. 기획 프로세스 및 기준 문서 작성
3. 기획-개발-물류-마케팅-영업 등 커뮤니케이션
4. 운영진의 아이디어를 구체화, 제품화
5. 그 밖에 홈페이지 등 리뉴얼
이곳도 기획에 대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기획팀을 신설하려는 회사를 보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있다.
'기획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기획팀에 대한 경험이 없는 회사는
기획팀을 사업기획으로도,
단순 와이어프레임을 그리는 사람으로도,
운영진의 서기 급으로 보기도 한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란 식이다.
때문에 기획자, 특히 책임을 가지는 시니어급은 늘 힘겨루기에 힘들다.
기획자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하는 사람이며,
일을 하기 위해 갖춰져야 할 제반 사항은 무엇이며,
등등을 회사 운영진과 채용팀과 개발팀과 영업팀에
논리적으로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말해줘도 '원하는 기획팀 상'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은 시행착오와 기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기획이 처음인 이 회사에서의 경험도 어느 정도 예측이 되었다.
그러면 어떤가.
나는 프리랜서 아닌가.
갔다가 아니다 싶으면 빽이다.
현실은 기대와 다르기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기도 했다.
시간에 제약이 없을 것 같던 프리랜서에 대한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프리'라는 게 '퇴근 시간 프리' 였을 줄이야.
기간이 정해져 있으니 회사는 그 기간 안에 내 모든 걸 빼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아침-점심-저녁 연락 창구를 활짝 열어둬야 했을 뿐 아니라
워킹타임에는 나 죽었소 하고 일만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쉴 틈도 없었다.
주어진 일을 하면서 늘 다음 수를 제시해줘야 했다.
이 과정에서 나를 채용한 이사는 매우 불안해했다.
본인이 채용한 나를 효과적으로 써야 하는 반면,
본인의 롤을 지킬 만큼만 내가 일해주길 바랐다.
조금이라도 '발전'하려고 하면 날 찍어 누르기 일수였다.
프로젝트는 그만큼 느려졌고,
기획은 퀄리티가 떨어졌고,
개발팀은 의문을 가졌다.
계약기간이 끝날 때쯤
CEO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CEO와 이사 사이에 균열이 간 중에
이사가 프로젝트의 병목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날 소환해서 자초지종을 듣고자 했다.
나는 뭐.
물어보면 말하니까.
솔직하게 문제점을 읊었다.
그리고 이사는
일진처럼 날 화장실 앞에 불렀다.
10년 차 만에 회사에서 눈물이 났다.
찍어 누르기 식의 기싸움에서 졌고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그렇게 프리랜서의 세계를 경험했다.
기대했던 자유는 없었고,
내 모든 시간을 회사에 저당잡힌 듯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난 다짐했다.
눈물이 나도록 하는 회사는 다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