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퇴사계획 - 13

글이라도 써야 유죄를 면할 것 같아

by 채움

회사를 잠시 떠나기로 했다.


우선 회사에 긴 휴가를 신청했다.

휴가 신청을 고민했을 땐 매일 밀려오는 업무에 야근과 회식에 몸이 망가져 있었다.

그래도 견딜만했는데, 하루가 다르게 엄습하는 고용 불안정이 몸 망치기를 가속화하고 있었다.

휴가를 낸 것은 이직을 염두에 둔 전략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망가져버린 몸 때문에 신청한 휴가였다.

휴가 동안에는 병원에 가서 치료나 받을 생각이었다.


내가 쉰 사이 회사는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내가 없는 틈을 타 우리 팀을 마음대로 변화시켜 볼 생각이었던 듯하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인사발령이 나기 시작했다.

인사발령은 팀이 바뀌기도, 근무지가 바뀌기도 하며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이어서는 퇴사자가 발생했다.

조직도 없어지고 있었다.

매일 고민을 토로하는 동료들의 소식과 이어 퇴사한다는 소식이 또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몸이 아파서 시작된 긴 휴가는 회사와 영영 작별의 시작이 되었다.




몸은 회사를 떠나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사내 공지사항이나 메신저만 봐도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됐다.

몸도 마음도 편하게 쉬지를 못하고 갈팡질팡이었다.


'나는 돌아갈 수 있는 건가?'

'지금 시간을 이용해 이직을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내 의문에 답을 해줄 이는 시간 밖에 없는 듯했고,

시간은 가까운 시일 내 딱 떨어지는 답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회사를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이직이라니.

회사를 떠난다는 것이 아깝고 아까웠다.

내가 공을 들인 프로젝트들, 우리 팀, 성과와 연봉.

온 마음속이 뒤집힌 진흙탕처럼 뿌연 느낌이었다.


그다음엔 바늘구멍만큼 작아진 취업문턱을 넘을 일이 아찔했다.

요즘 취업시장이 만만치 않다는 건 내가 면접자 일 때 이미 느껴졌다.

주니어를 뽑는 자리에도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부터

나와 비슷한 연차의 시니어들이 많았다.

이 정도 경력이면 CTO를 하셔도 될 분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회사에 지원할 정도면 바깥세상이 어떤지 짐작이 됐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나도 한 자리 차지할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일단 회사에 몸 담고 있는 것은 맞으니 천천히 찾아보기로 했다.

이력서 쓰기보다 먼저 나와 맞는 회사와 자리를 찾는 게 중요했다.

이 과정부터 녹록지 않음을 경험하며 한탄이 밀려 나왔다.

'내가 이제껏 해온 게 이 정도였나'

'목숨 걸듯 열심히 했었는데, 이게 결과인가'




회사들은 문제가 없었다.

다만 내가 아직은 이직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회사나 직무나 나한테 맞는 옷이 없는 것 같달까.


먼저 퇴사한 동료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내가 도움을 준 친구들도 고맙다며 인사를 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긴 휴가의 어디쯤에서 그냥 멀뚱히 멈춰있을 뿐이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아직 나는 회사에 다니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왜 내가 퇴사를 결정했는지 이유를 쓰는 것조차 그래도 되나 싶었다.

솔직히 이유를 들으면 누구나 납득할만한 막장급 전개지만,

아마 과정을 털어놓는 것은 퇴사 후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잠시 쉬기로 했다.


몸도 마음도 회사에서 온전히 거리를 두고

다음 스텝을 냉정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아직은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지만

좀 더 편안해지면 자연스레 다음 이정표가 보일 것이라는

내가 마음대로 만들어 낸 희망에 기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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