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승생악
오름보다는 산이라 할 만큼 두껍지만 육지의 등산보다는 훨씬 짧은 굵고 짧은 오름이 있다. 어승생악.
‘악’이라는 이름이 험준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탐방로는 한라산 코스만큼이나 잘 되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오름이다. 윗세오름의 어리목코스와 동일한 주차장을 사용하는 어리목휴게소에서 시작하며 편도 20~30분이면 충분하다. 어리목코스와 어승생악은 등산로 입구가 정반대에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윗세오름 어리목코스를 몰랐을 때에는 주차장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데 왜 반대편에만 있을까 의아했다. 알고보니 정말 인기가 많은 윗세오름을 가는 경로가 그곳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입구에 들어서면 봄에는 싱그러운 숲길부터 시작한다. 낮은 계단을 쭉 따라 올라가면 금세 한라산 조릿대밭이 펼쳐진다. 아이들이랑 올랐을 때에는 첫째가 조릿대로 복조리를 만든다고 하나둘씩 따면서 걸어갔다. 저걸로 진짜 뭐가 되긴 할까 의문이었는데 실제로 미니어쳐 복조리를 만드는 데에 성공하긴했다.
낮은 계단과 평탄한 탐방로를 지나면 후반에 험준한 바위 계단들이 이어진다. 그 헉헉댐을 이겨내고 좁다란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장관을 맞이할 수 있다. 봄에 회원들과 올랐을 때에는 하얀 구름이 지평선을 따라 눈 앞에 하얀 카페트처럼 깔려 있고 저 멀리 푸른 바다가 얼핏 보이는 게 천상에 오른 듯했다. ‘신들의 세상이로구나.’ 노꼬메오름 처럼 마을이 자세히 내려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보다 훨씬 위에 있으니 또 다른 천상의 맛이다. 시간이 지나니 바람에 구름이 싹 걷혀 산 아래 먼 제주바다까지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바람의 변화가 무쌍한 제주는 한 장소에 있더라도 시시각각 뷰가 바뀐다. 어디를 가더라도 가만히 앉아 바람의 시간을 꼭 느껴보길 바란다.
그 겨울 육지에서 지인과 아이들이 방문한 적이 있었다. 겨울의 설산을 보여주고 싶어 어승생악을 데려갔다. 도착해서는 아차싶었다. 눈이 녹고 빙판이 되어 ’아이젠 착용 필수‘ 현수막이 입구에 크게 붙어 있었다. 나는 일전에 급하게 다이소에서 구입했던 아이젠이 있었으나 우리 아이들을 비롯해 그 친구들까지 모두 장비가 없어서 잠시 고민하다가 가는데까지 가보자며 입산했다. 일단 왔으니 돌아갈 수 없다는 심보다. 그 심보 하나로 밀어붙여서 맛 본 성공이 한 둘이 아니기에 계속 밀어붙이는 중이다.
아이들은 몸이 가볍고 미끄러져도 큰 부상을 입지 않으니 큰 걱정이 되지 않았고 예상대로 우리를 훨씬 앞질러 언젠가부터는 아예 시야에서 벗어났다. 문제는 같이 가는 지인이 계속 미끄러지고 빙글빙글 돌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운동을 평소에 꾸준히 하는 분인데도 빙판 위에서는 영 맥을 못 춘다. 일전에 제주에 폭설이 왔었던 터라 지대가 높은 어승생악도 많이 쌓여 있어 계단이고 탐방로고 아예 없었다. 계속 빙판로를 걸어가야하는 상황이었다. 한창 눈밭과 실랑이 끝에 그 분이 아무래도 더 이상 못 가겠다고 하던 찰나였다. 정상에서 내려오시던 아주머니께서 우리 대화를 들으셨는지 정상에 꼭 가보라고 안 가면 후회할거라는 비장한 말씀을 남기고 떠나셨다. 그 말에 다시 용기를 얻고 내 아이젠을 한 쪽씩 나눠끼고는 결국 끝까지 올라갔다. 그렇게 황홀한 정산의 눈꽃과 설산을 만나게 되었다.
감동에 겨운 그 분의 한 말씀
진짜 정상에 안 왔으면 후회할 뻔 했어.
나도 그 감정을 너무나 잘 알기에 손님이 오면 오름을 꼭 데려간다. 오르는 길이 순조롭거나 어떠한 장애가 있더라도 일단 정상에 오르면 바람의 눈물처럼 싹 흩어진다. 오르막의 미학이라할까. 그 때 나무 기둥을 부여 잡고 미끄러워 빙글빙글 도는 그 분의 모습은 당시엔 아찔하고 난감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본인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지만 사진에 담아 두지 못한 게 참 아쉬울 정도다. 이렇게 또 찐한 추억 하나를 안겨주는 어승생악 참 고맙다.
봄여름가을 다 좋지만 겨울에 더 자주 찾게 되는 어승생악. 겨울에 윗세오름 가기가 버겁다면 어승생악에만 올라도 눈꽃과 설산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하산하는 길에는 아이들이 누워서 인간눈썰매가 되어 내려오기도 한다. 또 어리목 주차장에 1m가 넘는 눈밭이 한켠에 있다. 주차장 눈들을 쓸어 모아 그렇게 높이 쌓인 듯하다. 거기에만 가도 눈싸움하고 눈사람과 이글루를 만드는 등 눈놀이하기에 여념없다. 강원도 스키장을 방불케한다. 오히려 자연 눈이니 더 좋지 아니한가.
올겨울에도 이상기온 탓에 눈이 많이 올 듯하다. 눈소식이 들리면 어승생악으로 떠나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