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에 한 맺힌 사연

천아숲길

by 민작가


오름 모임덕분에 매주 2시간 내외로 걷다보니 체력이 점점 올라왔다. 코스 길이도 차차 늘려가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였다.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을 들고 나오다가 계단에서 헛디뎠는데 어이없게 인대파열이 된 것이다. 그 당시 주변에 어처구니없는 일로 인대가 파열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오름 모임 중 한 분도 함께 걷다가 인대가 파열되어 나오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게 조심했건만 정말 허무하게도 사고가 발생했다.


병원 처방은 반깁스. 약도 없고 그냥 쉬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름도 올스톱이 되어버렸다. 그 당시 단풍이 무르익을 때라 제주도에서 단풍명소 중 하나인 한라산둘레길 1구간 천아숲길 코스를 공들여 연구했었다. 시간이 대략 3시간인 중장거리 코스인데다가 시작점 주차도 힘들고 1구간 끝나는 지점에 차량도 필요하고 단풍구경인만큼 단풍시기도 잘 맞춰가야한다.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투자한 코스였는데 이 다리를 하고는 갈 수 없다는 절망과 실망에 짜증까지 몰려와 며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걸을 수 있는 회원분들 몇 명은 걷고 나는 단풍명소 천아계곡에서 단풍구경만 눈요기만한 후 끝나는 지점에서 회원들 픽업만 도와주었다. 그렇게 한이 맺힌 코스가 천아숲길이다.



작년을 그렇게 보낸 후 올해는 기필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단풍을 기다렸다. 모임을 목요일마다 가다보니 단점이 있다면,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 코스를 갈 경우 주말에 절정일 때 그 이전 목요일이나 이후 목요일에 다 절정맛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번 단풍은 주말이 절정이었던 것 같다. 한라산둘레길 1구간 시작이 천아계곡이고 그곳에서 단풍이 가장 돋보이는데 우리가 갔을 땐 단풍이 져서 휑한 겨울나무들이 꽤 눈에 띄었다. 올해 유독 단풍이 진하지 않았다는 평도 있고 좀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 아쉬움을 뒤로하고 숲길로 들어섰다.


한이 맺히면 그만큼 기대도 큰 법.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시작부터 험난한 계단이 반겨준다. 친절하게 옆에 밧줄까지 드리워져있다. 그만큼 오르기 힘들다는 얘기다. 아니나다를까 다리가 저릴 정도로 계단이 심상치 않다. 평소 많이 걸어서 오르막은 자신있는데 그런 자신감이 문제였을까, 찌릿찌릿함이 꽤 오랫동안 가시지 않을 정도였지만 다른 회원들은 별 말없이 걷기에 나도 따라 걷다보니 서서히 풀렸다. 그 오르막만 지나면 걷기 좋은 숲길의 향연이다.



숲 속은 아직 여름의 싱그러움이 남아 햇살이 드리우면 따뜻하고 바람이 불면 시원하다. 천아계곡만큼의 붐빔이 없이 한두팀이 간혹 스쳐간다. 1시간 넘게 걷다보면 또 계곡이 나온다. 천아계곡의 연장선인 듯하다. 거기 앉아 주섬주섬 간식거리 꺼내어 당을 보충한다. 나비가 끊임없이 짝을 지어 나폴나폴 날아다니고 저 아래 계곡까지 펼쳐진 단풍과 노릇노릇 나무와 초록초록 나무들이 얽혀진 풍경이 액자 속 그림같이 머리와 가슴에 저장된다. 아래 계곡에서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 돌을 타고 올라오시길래 길이 있나 여쭈니 풍경이 좋아 아래 잠시 내려갔다오셨다고 한다. 사람들 마음은 참 매한가지다. 모두 다른 듯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비슷한 생각들을 품고 산다. 그 자리에서 가을을 만끽한 후 다시 갈 길을 간다.


한라산 둘레길은 리본이 잘 갖추어져 있어 길 잃을 걱정은 붙들어매도 된다. 갈래길이 많지도 않거니와 진한 핑크색 리본이 ‘너희가 길을 잘 가고 있노라.’라고 말해주듯 드문드문 안내판 역할을 톡톡히 한다. 어두운 계곡 숲길에서 빠져나오면 밝은 숲길이 다시 반겨준다. 낙옆이 떨어지고 키가 큰 나무들이 길 가장자리로 쭉 뻗어 있어 햇살이 내리쬐면 밝고 안정적인 숲길이 된다. 비슷한 숲길이 계속 이어지니 언제끝나나 방향이 잘 맞게 가고있나 걱정할 즈음 버섯을 재배하는 보림농장이 나온다. 그 좁은 삼거리가 1구간 끝이자 2구간 시작이다. 내 차를 그 비좁은 곳에 끼워 주차해 놓았기에 1구간만 걷고 차를 타고 그 기다란 숲길을 재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1시간은 더 걸어야 도달하는 주차장이라고 할 만한 조그마한 공터에 차를 주차해 놓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버거운 1시간이다. 이미 3시간 넘게 걸어 차에 앉자마자 다들 ‘어우’ 신음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운다. 신나게 먼지 폴폴 날리며 나무 빽빽한 숲길을 빠져나올 때 기분은 정말 홀가분하다.


이렇게 1년동안 묵혀둔 한을 푼다.

때로는 한을 묵히는 것도 좋구나싶다. 그만큼 열정과 열의를 다해 한을 풀고자 매진할 테니 말이다.

올해는 어디에 또 한이 맺혀있나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