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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골 편지
13화
어떤 구멍
by
조희
Sep 1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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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구멍
조희
구멍이 나를 키우기 시작했다
구멍의 가장자리를 걷는 물새들
물새 같은 여자들이
미루나무 길을 지나 강으로 갔다
나도 가끔 엄마를 따라갔는데 그때마다
등 뒤에서 무엇인가가 뒷덜미를 움켜잡는 것 같았다
누군가 구멍귀신 얘기를 했는데
뒤를 자주 돌아보곤 했다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어둠의 말들
모래밭에 작은 구멍들 세상의 틈새들
조개구멍이었다
금방이라도 구멍귀신의 역사가 새나올 것 같은 입술들
물새 발소리를 닮은 여자들의 신음소리
그것들은 그림자를 길게 키웠다
지우개처럼 지우기도 했다
강물에 휩쓸려가는 슬픈 가루를 보다가
어느 날은 구멍에 빠지기도 했다
조개 잡던 두 손을 허우적거리면
점점 깊이 빠져드는 모래밭
어떤 아줌마는 그것을 십자가라고도 했다
등에 식은땀이 났다
구멍 바깥의 빛을 떠올리면
손바닥 안에 있던 조개가 꿈틀거렸다
양동이에서 조개를 쏟았는데 구멍의 빛이 물결쳤다
억센 손길이 나를 흔들어 눈을 뜨니
아랫목이었다
이틀 만에 눈에 뜬 거라고
이번에도 키가 한 뼘은 크겠다고
엄마는 얼음주머니로 내 이마를 쓸어넘기면서 말했다
그때는 썰물과 밀물을 이해하지 못했고
인간에게도 구멍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인간의 안으로만 커지는 구멍은
인간의 성장판 세상의 숨구멍 바람의 문
그 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별들도 밤하늘에 구멍 하나 파고 반짝인다
구멍이 별을 만든다
구멍이 나를 만든다
https://blog.naver.com/jahanjae/1101757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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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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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내일을여는작가 신인상.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가. 작고 사소한 것과 쓸모없는 것들에게 귀 기울이고 있다. 공저 [뭉클했던 날들의 기록], 공저 [종이배에 별을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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