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사상』 2024 여름호
조희
멀어지던 너는 잠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벌판의 풀들이 한몸처럼 초록을 흔들고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을 흔드는 풀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미사일이 터지고 건물이 무너지고 죽은 자가 숫자로 보도될 때 나는 누가 나의 유리창을 깼는지 알 수 없었고
그때도 구멍 난 창문으로 공원의 풀들이 바람에 눕는 것만 바라보았다.
무심코 사할린 풀들이 어제 죽은 얼굴빛으로 검은 바람을 몰고, 빛을 통과하지 못한
풀들이 피를 쏟고 흙에 묻은 피의 기원을 찾아 풀의 영토를 흔드는가 지금 내 앞의 풀들은 쉬지도 않고 왜 몸을 흔드는가 풀을 뽑아 거꾸로 보면 눈에 덮여 썩지 않는 뿌리는 누군가의 슬픔이 되고
작은 일에도 분개하지 않는 나는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말이 떠올라
갑자기 울고 싶었다.
여름이 벌판에 끼어 들어서 더욱 울고 싶었다.
이제 너는 미래처럼 멀리 달아나
손나팔을 하고 크게 불러볼까 생각하다 알 수 없는 풀잎들 사이사이 움직이는 빛과 그림자들로
풀잎들이 돌리는 젖은 날씨로
너를 잊기로 한다.
원래 열지 않은 상자일 때가 좋으므로
바지 끝에 물든 풀빛을 보며 미래를 버리기로 했으므로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바탕이미지 사진은 2024년 7월초 울릉도여행 갔을 때 나리분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