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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 Mar 02. 2024

소원을 말해봐!

건강과 행복

토요일 오후 남편과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 아파트 근처 기접놀이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화려한 복장을 갖춰 입은 풍물패들이 꽹과리, 북, 징, 장고 등을 들고 걸치고 전수관 안으로 모여들고 있었고  사람들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정월대보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신호대기에 걸린 채 우리는 평소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여 문도 제대로 열지 않은 '새 냇가' 카페 내부에 환한 조명이 켜지고 차를 마시는 2층 공간의 한옥창문도 활짝 열려있는 모습을 보았다.

전수관 안에서는 어른들 아이들 모두 제기차기, 투호 던지기, 고리 던지기 등 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재밋거리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나와 남편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달집놀이가 예정되어 있는 천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늘은 이미 회색빛 색감에 물들어 있었고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대나무, 소나무 가지등을 쌓아 만든 키다리  달집 위에도 촉촉한 습기를 내뿜게 하고 있었다.

안전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달집 주변으로 넓게  펜스 가 둘러쳐지고 알록달록 우산을 받쳐든 사람들은 구경하기 좋은 자리를 잡고 추위에 맞서 기다림을 인내하고 있었다.

저마다 소원을 적은 많은 소원종이들 사이에 우리도 가족의 건강과 안위를 적은 소원종이를 길게 엮어놓은 짚에 매달아 놓고 행사장 주변의 복잡을 피하고자 계단 위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에 젖은 가오리 연 은 불어오는 바람에 덩실덩실 하늘에서 춤을 추고 있고 건너편 천변의 산책로에서 는 며칠째 내린 비로 물에 잠긴 징검다리를 건너지 못한 사람들이 이쪽 편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역의 내빈들이 각각 소개되고 간단한 행사인사를 하는 중에 비는 점점 그 굵기를 더해가니 세워놓은 달집에 불이 안 붙으면 어쩌나 나는 속으로 노심초사하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준비위원들은 연신 아래부터 위쪽까지 석유를 뿌려대고 불이 안 붙을 염려 따윈 떨쳐내라는 듯한 진한 석유 냄새가 마스크를 쓴 코 속까지 스며든다.


그 후로도 한참을 한해의 풍요와 건강을 비는 제를 지내고 횃불을 지필 사람들에게 순서를 설명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달집 태우기 가 시작되었다.

불을 통해 모든 그릇된 것과 악한 것을 정화시키고 질병과 근심이 없는 밝은 새해를 맞이하려는 사람들의 소망을 대신하는 의식이 달집 태우기라고 한다.

드디어 한 사람씩 돌아가며 각자의 횃불을 던지기 시작하자 어둑어둑 해져가던 사방은 순식간에 활활 타오르는 불빛으로 인해 밝아졌다.

줄기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무색하게 불빛은 점점 더 거세어져 나와 남편이 서있는 곳까지 그 열기가 전해지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갑진년 용의 모습을 닮은듯한 불빛

조선시대 황진이의 춤사위처럼 쉬이 사그라지지 않는 불빛은 소원을 빌며 자리를 뜨지 못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을 태우기라도 하듯 꺼질 줄 모르고 숨을 이어갔다.

행사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드디어 풍물패가 달집주위로 나오기 시작했다.

언제 들어도 흥겨운 풍악소리와 함께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흥을 돋우고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도 그 대열에 합류하며 어깨춤을 추었다.

그 대열에 끼고 싶다는 나를 말리는 남편에게 삐죽하고 입을 내밀고는 나는 소심하게 어깨춤을 추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돌아오는 길에 어린 시절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교 때로 생각되는 어느 해 정월 대보름 늦은 밤 우리 동네 논에서 학생들이 깡통을 돌리며 쥐불놀이를 하다가 논에 세워둔 볏짚을 홀랑 태우는 일이 발생했다.

그 일로 동네는 한바탕 난리가 났고 어느 집 자식들의 소행인지 를 알고자 하는 여론이 며칠 동안 들끓었다.

그렇게 하여 옆동네 최가네 자식, 아랫동네 김가네 자식, 숨어든 죄인들을 색출하는 마을 어른들의 프로파일러 못지않은 추리력에 모임에 가담한 동네 오빠 언니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추리력에 밝혀진 진실 끝에 세상에나 '이가네 넷째 딸' 바로 우리 언니가 끼어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그곳에 모여있던 고등학생 오빠들의 발 빠른 대처로 큰 불로 번지는 것은 막았지만 그로 인해 언니는 한동안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집안에서 다소곳이 있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면죄받았다.


시대가 변하고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많은 풍습들이 현대의 첨단화된 시설과 짜릿한 놀이들로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는 요즘이지만 아직도 지역 곳곳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전통놀이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 누군가는 나의 기억과 추억을 지켜주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화사해진다. 


어린 시절 엄마는 먼산아래 커다란 보름달이 뜨면 소원을 빌어보라고 말씀하셨었다.

오늘 흐린 날씨 탓에 영롱하고 맑은 보름달은 보지 못했지만 과거의 어느 땐가 엄마와 함께 보름달을 바라보던 그때로 돌아가 그리운 엄마의 얼굴을 가만히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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