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가을
작은 오빠는 전력질주를 하며 논을 향해 뛰었다.
부엌방에서 아픈 배를 움켜쥐고 실랑이를 하던 엄마를 초조하게 바라보며 얼마 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응애응애" 쬐만한 아이가 불쑥 나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오빠에게 엄마는 논에서 일하고 있는 아빠에게 가서 알리라고 말했다.
"아빠한테 가서 '남의 새끼' 낳았다고 말해라."
작은 오빠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잊어버리지 않으려 중얼중얼 입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남의 새끼 남의 새끼'
그때 오빠 나이 9살, 도대체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알았으랴.
그렇게 가을 추수가 한참이던 때 나는 우리 집의 7번째 늦둥이로 세상에 나왔다.
요즘시절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
가족들이 나의 생일을 말할 때면 항상 '이쁜 계절에 태어난 너'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릴 때부터 가을을 참 좋아했다.
장태산의 계곡
가을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면 일조량이 감소하면서 나뭇잎들은 점 점 다양한 색으로 변해간다.
붉은색, 노란색, 갈색, 언뜻 보면 이 세 가지 색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안에서도 미세하게 변화하는 여러 가지 색감을 알아챌 수가 있다.
카드뮴 오렌지, 잉글리시 레드, 버밀리언 레드, 카드뮴레드 딥의 붉은 계열색과,
레몬옐로, 인디언 옐로, 카드뮴 옐로 딥의 노란색 계열,
딥 오우 커, 번트시에나, 옐로 시에나의 브라운 계열,
그린, 비리디안, 코발트그린, 골든 그린, 샙 그린 등의 녹색.
이렇듯 다양한 색의 연출로 더욱 풍성한 가을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단풍이다.
금요일 오전.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대전의 장태산.
그곳을 방문한 적은 여러 차례 있지만 항상 추운 겨울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메타쉐콰이어가 이쁜 그곳으로 오늘의 행선지를 정했다.
한가한 국도를 따라 차를 달리며 차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들녘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찰나의 순간에 뒤안길로 사라져 버려, 이름 모를 꽃들과 추수가 끝나고 난 후 논 바닥에 뾰족이 남아있는 그루터기들을 보는 재미들을 놓치기 일쑤였기에 웬만하면 나는 국도를 선호한다.
빨갛고 파란 지붕의 시골집 담벼락 옆 에는 바알 간 감들이 주렁주렁 열려있고 쌀쌀해진 들녘에서는 김장을 위해 배추포기를 수확하는 농부들이 구부정하니 허리를 굽히고 분주하게 일손을 놀리고 있다.
갈대 인지 억새인지
갈대와 억새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갈대와 억새가 항상 헷갈려"
"갈대는 갈색 억새는 하얀색 아냐?"
남편의 말을 듣고 네이버를 열었다 이참에 확실히 알고 넘어가야지.
갈대는 습지, 물가, 억새는 산, 들판 건조한 곳에서 서식한다고 한다.
갈대의 꽃대는 갈색이며 잎 가운데가 비어 있고, 억새는 은빛 흰빛이고 잎 가운데에 하얀 줄무늬가 있다고 한다.
또 키는 갈대는 2m 이상, 억새는 1-2m 정도란다.
갈대의 개화시기는 9-10월, 억새는 9-11월로 둘이는 참으로 비슷한 형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1시 반 지루 할 틈 없는 시간을 달려 장태산에 도착했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입구까지 교통체증 없이 한가했다.
11월 주말이면 흑석네거리에서 장태산 입구까지 4km 정도 거리인데 약 1-2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주차장을 향해 가는데 차가 많아서 차 안에서 20여 분을 앉아 있었다.
주차 스탭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조금 들었다.
어렵게 차를 주차하고 나와 남편도 다른 사람들처럼 출렁다리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없었던 다리가 새로 생겼다.
선명함과 탁함의 단풍나무 사이로 빨간 옷 노란 옷 녹색옷 등 을 입은 사람들의 물결들이 뒤섞이며 그야말로 숲 은 장관을 이루었다.
사람도 그 안에 있으니 자연과 한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감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수만 가지 색들이 캔버스 위를 채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쓸쓸해져 가는 마음만큼이나 찬란한 조각들이 가득 들어찬 내 속은 어찌할 바 모른 채 속수무책이 되어 가을을 받아들이며 아프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잠재우느라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발길에 감기는 낙엽들을 털어냈다.
키가 큰 메타쉐 콰이어 나무들 사이로 만들어진 둥그런 원형의 설치물은 올라가는 재미가 있었다.
성장속도가 빠른 편인 메타쉐콰이어 나무는 중국과 우리나라에 많이 남아있지만 환경오염과 서식지 파괴 등으로 멸종위기에 처해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바람이 쏴아 부니 위아래에서 흩날리는 가을의 향이 젖은 흙냄새 같기도, 씁쓰레한 커피 향 같기도, 오묘하기도 한 것이 한마디로 표현되지 않는 지금의 내 마음 같기도 했다.
따듯한 코코아 한 모금을 마시자 목 안에서 젖은 낙엽향이 올라온다.
눈에도 코에도 입안에도 가득한 가을향에 현기증이 난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낙엽은 우수수 떨어지고 가을은 저만치 앞서서 나를 끌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