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수채화

오늘도 행복했다

by 피노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사위는 어두웠다.

출근을 하지 않는 날 비 내리는 바깥 풍경 보기를 좋아하는 나는 괜히 아침부터 기분이 살랑대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했다.

다용도실 보일러 연통 위에 '똑 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연신 확인하며 포트에 물을 끓이고 이런 날엔 꼭 마셔줘야 하는 믹스커피 분말을 종이컵에 부었다.(믹스커피는 종이컵에 마셔야 제맛)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가며 한 모금 음미하고 달착지근한 첫맛과 부드러운 끝맛을 동시에 느껴보았다.

이 달달함이 주는 당분과 부드러움이 주는 칼로리 덕분에 사람들은 더 이상 믹스커피를 마시지 않으려 한다.

가끔 커피전문점에 가보면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도 아메리카노는 기본이고 나는 알 수도 없는 종류의 커피를 앞에 두고 분위기 있게 커피잔을 들어 올리는 광경을 보게 된다.

커피가 더 이상 젊은 세대들을 대표하는 트렌드는 아니구나 생각했다.



오래전 이름도 생소한 낯선 커피를 눈앞에 두고 -그저 이름이 이쁘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시켜준- 어떻게 먹어야 제대로 먹는 거냐며 한참을 떠들어댔던 기억이 난다.

진한 커피 위에 이쁘게 펌핑된 휘핑크림을 휘젓기도 난감해서 살짝 마시니 크림만 입안으로 쏘옥 들어왔다.

아인슈페너라는 이름을 가진 그 커피를 몇 차례 더 경험해 보며 그 커피는 그렇게 크림 따로 커피 따로 마시는 것이 제대로 된 커피맛을 즐길 수 있는 정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아인슈페너 커피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운 날 마차에서 마부들이 커피를 마실 때 흘리지 않도록 크림을 두껍게 올려서 만든 마부들을 위한 커피였다고 한다.

스토리를 알고 난 후 그 커피를 마실 때 괜히 조심조심 마셔보았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커피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



오후가 되고 조금 더 굵은 빗줄기가 연통 위에 리드미컬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남편이 드라이브를 가자고 한다.

드라이브 쓰루에서 남편을 위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텀블러에 담아 도시 근교로 차를 몰았다.

복숭아 과수원도 배 과수원도 뿌연 안개에 드리워진 오후의 전원 풍경이 제법 근사하게 시야로 들어왔다.

따듯한 아메리카노와 어울리는 꽈배기를 사러 차를 주차시켰는데... 하필이면 딱 그날까지 휴가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이곳을 지나다 휴가 안내를 위한 현수막이 붙어있는 것을 보았는데 날짜까지는 기억을 못 했다 우리 둘 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원래 계획대로 한적한 곳에 위치한 저수지로 향했다.

그곳은 내가 가끔 친구와 바람 쐬러 가는 곳이기도 한데 제법 큰 저수지 둘레에 데크가 놓여있어 산책하기에 알맞고 작은 공원도 있어 흔들 벤치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기에도 안성맞춤인 장소다.

그날은 비로 인해 차에서 내리지는 않고 저수지가 보이는 주차공간에 차를 대고 눈앞의 풍경을 즐기기로 하였다.



시동을 끄고 텀블러를 여니 차 안에 그윽한 커피 향이 퍼지며 쌀쌀한 날씨에 움츠려 들었던 어깨가 덩달아 펴졌다.

꽈배기는 없었지만 커피를 한 모금씩 나눠마시며 차 유리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맺혀있는 빗방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리에 물방울들이 틈새 없이 가득 메워질 때까지.

옆에서 호로록 거리며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젊은 청년이었던 얼굴 위로 덮인 눈가의 주름과 팽팽함이 많이 사라진 남편의 얼굴이 그동안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해서 잠깐 마음이 센티해졌다.

코로나 시절 그날 오늘보다 훨씬 많은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려댔고 우리는 같은 장소인 이곳에 앉아 포장해 온 음식을 먹으며 바깥의 운치를 즐겼다.

포장해 온 용기의 뚜껑을 여는 것부터 힘들어서 우리가 선택한 메뉴가 한참 잘못되었다고 투덜댔었다.

짬뽕을 포장해서 왔는데 면발을 들어 올릴 때 국물이 튀어 먹기가 불편했지만 유리창에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는 즐거움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남편과 그때 얘기를 하며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이라는 게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 시절 마음과 몸이 모두 우울할 때 남편은 여러모로 나를 위해 신경 써줬다.

코로나에 걸려 방 안에서 며칠 동안 격리할 때 끼니때마다 밥상을 차려 넣어줬고 내가 불편하지 않게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었다.

새삼 그때를 생각하며 평소에도 남편이 나를 위해 애쓰고 있고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산다는 미안함에 남편의 얼굴을 따듯하게 한번 더 바라보았다.

가끔 남편이 나에게 서운해서 화를 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산을 들고 저수지 둘레길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빗속을 저렇게 걷고 있을까.

우중 산책을 좋아하는 나도 가끔은 비가 올 때를 기다려 밖으로 나간다.

하늘이 보이는 투명 우산을 받쳐 들고 그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맞춰 경쾌한 벌걸음을 옮길 때 무언가에 맺혀있던 가슴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기분을 느끼기도 하면서.

저수지에 잔잔히 번져가는 빗방울들을 바라보며 이런 시간들이 나에게 주는 행복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차 안에 울리는 클래식 음악의 선율, 떨어지는 빗소리, 한참을 바라보아도 물리지 않는 자연, 편안한 감정을 느끼며 나누는 이런저런 사소한 수다들.

행복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을 좇으려 먼 곳에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무시로 곁에 두고 매일매일 꺼내 보고 만져볼 수 있을 때 절대적으로 드러나는 가치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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