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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ela Apr 13. 2024

죽음 이후의 삶과 현재의 삶

2024년 <질문의 편지> 프로젝트 - 4월의 편지

(질문)

이 질문은 '죽음 이후' 에 대한 당신이 갖고 있는 평소 믿음과 별개로 하나의 가정 아래 다른 시각에서 '죽음'에 관한 상상을 해보기 위함이다. '죽음'은 '나'의 '소멸' 이다. 질문의 계기가 된 푸코의 책에 나오는 구절처럼 '영혼' 이란 개념은 우리 몸의 유한함과 나의 예정된 소멸의 한계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인간이 창조한 '신화' 일지 모른다. 현실에서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것은 '먹고', '마시고', '보고' 그를 통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육체'를 전제로 성립한다. 우리가 여러 작품이나 상상 속에서 떠올리는 '영혼'은 육체에서 풀려나고도 여전히 '인간'의 형상을 하고 생각하고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육체' 와 '물리적', '시간적' 제약이 부재한 조건에서는 '기쁨', '포만감', '만족', '실패', '좌절' 같은 것도 '발생'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영혼이 있고, 각 영혼들이 다른 차원에서 또 다른 관계를 맺고 세계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건 죽지않고 다시 살고 싶은 인간의 표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영혼' 얘기를 거두고 나면 떠오르는 질문들이 있다.


'죽음'을 '꿈도 꾸지도 않고 인식하지도 못하며 깨어나지 못하는 영원한 잠의 상태' 라고 하자. 육체는 멈췄고 아무 자극과 감각도 당신에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으며, 당신은 육체의 모든 생명활동의 정지와 함께 '죽음'의 순간을 기점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남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나는 계속 존재하지만, '나'의 관점에서 내가 인식하는 '나', 지금까지 스스로 먹이고 단련하고 기쁨을 느끼는 주체가 되는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소멸' 했다. 그러고 나면 생각의 한구석을 자극하는 인식이 있다.


많은 작품 속에서 그러하듯 '영혼'을 전제하면 사람들은 삶에서 많은 것들을 미뤄뒀다가 죽음을 계기로 그제서야 갖게 된 두 번째 기회에 여러가지 생의 복습을 시도하는 것을 상상한다. 혹은 죽음 이후에 있을지 모를 어떤 세계에 가서 청산해야 할 '의무' 또는 절대자에게 받아야 할 '평가'나 '심판'의 '신화' 안에서, 어쩌면 그 속에 '현생'을 보험상품처럼 묶어두는 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죽음'은 그렇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이 '영혼' 없는 '죽음'에서, 당신은 죽음 이후에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생각할 이유도, 책임져야 할 것도, 후회할 것도, 갚아야 할 것도 없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완전한 해방이고 자유일 수 있다. 현재의 삶이 연장되어 이어지는 그 어떤 시공간도 상상할 필요가 없다.


‘죽음 이후'에 관해 지금 내 삶이 연장되는 그 어떤 시공간도 상상하지 않는 것. 이 인식이야말로 빠져나갈 수 없는 내 육체 안에서 수많은 세월 동안 누적되어 쌓인 히스토리가 부과하는, 언젠가 죽어서라도 청산해야 할 것 같은 감각의 그 어떤 의무와 빚도 없는 진정한 자유의 감각을 실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지점일지 모른다. 주어진 단 한 벌의 육체를 가지고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정체성을 쌓아 올리며 살아가는 동안은 불가능해 보이는 '나'라는 주체의 완전한 '자유'가 작용하는 곳. 이는 죽어서도 '나'를 이어가야 하는 '영혼'의 세계와 반대로 오히려 '나'를 완전히 지울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인식에서 오는 자유다. 사전에 '자유'란 '자연과 사회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일'이라고 나온다. 그 인식의 잠재력 속에, 진정한 자유가 작용할 때 생성될 수 있는 에너지가 원자핵처럼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을 작동시키는 시기와 형태는 사람마다 가진 여건마다 다를 것이다.


지금까지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영혼 없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다시 떠올려 보자. 평소 당신이 갖고 있던 죽음 이후의 세계관과 비교할 때 얼마나 비슷한가 혹은 어떻게 다른가? 당신이 현재의 삶을 조금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죽음 이후의 세계관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 노웨이브


(답변)

개인적으로 나는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아직 발견하지 못하는 과학의 영역일 수도 있지만 현재 인류가 가진 지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부르는 명칭이나 개념도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영혼이 있다는 것이 지금 육체적으로 살고 있는 삶이 계속 이어진다는 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현생의 기억은 남아 있을 수도 있지만 영혼이 되면 모든 것이 리셋되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살면서 매여 있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세계에서 그저 평화롭게 사는 것이 아닐까. 평화롭다는 개념도 인간세계의 개념이기에 그냥 ‘무’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검증할 수도 없고 맞고 틀리다는 것의 영역이 아닌 것 같기는 하기에 순전히 내 생각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한 번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한 번 사는 인생이기에 하고 싶은 일은 꼭 시도라도 하자는 생각이 있었고 되도록 후회는 남기지 말자는 생각도 해왔다. 한 번만 살 수 있고 언젠가는 끝이 있기에 오히려 우리네 인생은 아름다운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죽음에 대한 세계관이라는 질문이 조금 어렵고 거창하게 느껴져 잘 표현한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렇게 살 때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용기를 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내가 좋아하는 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로 마무리 지어본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 콩이



2024년 <질문의 편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매달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는 프로젝트입니다. 4월의 편지 질문과 제 답변을 공유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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