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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사초 Aug 12. 2023

# 내가 먹는 것이 나를 이룬다

시간적 경제적 자유인의 삼시세끼

네가 먹는 것을 이야기해 주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   

                                                                                    - 프랑스 철학자의 말 -



직장을 그만둔 후, 내가 가장 공들이는 일 중 하나는 바로 삼시세끼를 먹는 일이다. 맞벌이로 정신없던 어느 날, 일에 지쳐 돌아온 아내가 지나가는 듯 말했다. 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누가 따뜻한 밥 차려주면 좋겠다고. 쉬는 시간도 없이 연달아 이어지는 일로 방전된 체력에, 집안일까지 감내하기가 쉽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사도우미를 고용할 수도 없었다. 아내와 나는 집안일을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아내를 위해 따뜻한 밥 한 끼를 수월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을 가졌지만, 음식을 만든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리 자체가 생소한 일이기도 했지만, 이제까지 가져온 고정관념부터 넘어야 했다. 어려서부터 어른들께 부엌은 여자의 공간이기에 남자는 부엌을 드나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런 말을 꼭 곧이곧대로 들어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때까지 부엌은 아내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부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고, 봉지에 적힌 레시피를 충실히 재현한 라면 끓이기가 전부였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 한 끼를 먹는 문제는 늘 일의 뒷전이었다. 출근으로 인해 아침은 거르거나, 아니면 서둘러 해결해야 할 것이었다. 점심은 직장에서 급식으로 간단히 먹거나, 근처 식당에서 대충 한 끼를 때우는 식이었다. 아침과 점심, 모두 시간에 쫓겼다. 한 끼를 먹으면서도 어떻게 먹었는지, 뭘 먹고 있는지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오직 일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의 한 끼였고, 당장의 허기를 면하기 위한 한 끼였다. 저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식이란 이름으로 일의 연속이거나, 내일의 일을 위해 서둘러 먹고 쉬어야 할 것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직업으로서의 일을 그만둔 후, 먹는 행위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는 여러 일상 중 먹는 행위가 차지하는 부분이 결코 작지 않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먹는가가 우리의 존재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먹는 것을 소비하는 방식이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적지 않게 기여할 수 있음을 배웠기 때문이다.


은퇴하고 하루종일 집에 머물게 되자, 놀라울 정도로 밥때가 빨리 돌아왔다. 밥 먹고 돌아서면 다시 끼니를 준비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 끼를 위해 밥과 반찬을 준비하고,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한 후 뒷정리까지 끝마치는, 이 일련의 과정에 이렇게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인 줄 미처 몰랐다. 오직 먹는 행위만을 위해 대여섯 시간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루의 많은 시간을 먹는 행위에 쓰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삶에 먹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잘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이기에 아무거나 먹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끼를 먹더라도 좋은 재료로, 건강하게 그리고 맛있게 먹고 싶었다. 맛집으로 알려진 식당을 찾아갈 수도 있지만, 우선은 집에서 만들어 먹기로 했다. 셰프의 근사한 요리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건강하고 좋은 재료로 우리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 먹고 싶었다. 물론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맛있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 가족과 함께 먹는 것은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에 충분한 가치를 가진 일이라 생각했다.


먹을 재료의 구입은 주로 동네 마트를 이용하지만, 5일장이나 재래시장을 찾기도 한다. 한 때 헬렌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의 책을 보며 자급자족의 삶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책에서 보는 것처럼 자급자족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이내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굳이 채소를 가꾸지 않아도 내가 번 돈으로 인근 지역에서 길러진 채소(로컬푸드)를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재래시장에서 직접 기른 채소를 들고 나온 분의 물건을 구입하고, 재료를 직접 생산하는 상점을 찾아가 소비한다. 마트에서 구입할 때도 가능한 생산자가 밝혀진 상품을 고르려 한다.   






먹는 행위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공간에 대한 인식도 바꾸었다. 먹는 일을 책임지는 공간인 부엌은 남녀의 역할이 구분되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먹는 행위로써 삶의 깊이를 채우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부엌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껏 금기시 여겼던 부엌 문지방을 쉽게 넘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처음 부엌을 들어선 것은 아내에게 '무엇'인가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내에게 결과물로서의 요리도 인정받고, 따뜻한 한 끼를 먹이고 싶은 내 마음도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음식을 처음 만들면서 '요리'라는 결과까지 바란 것은 애초부터 욕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내가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내든 맛있게 먹어 주었다. 기대 이상이라는 평과 함께, 이런 음식 솜씨를 숨기고 살았다며 원망 아닌 원망을 하기도 했다. 그런 아내의 반응에 자극을 받아, 나는 더 자신 있게 음식을 만들었고, 부엌은 이제 아내의 전유물이 아닌 나를 위한 공간이 되었다.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건 유튜브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전에는 요리 학원을 다녀야만 레시피를 배울 수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 집 부엌에서 여러 선생님들의 요리 강의를 듣는 것이 가능해졌다. 선생님들은 수강료를 받지도 않으시고, 하나하나 친절하고 상세하게 알려주셨다. 음식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와 과정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비법까지 전수해 주기도 하셨다. 한 번으로 부족한 나를 위해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두 번 세 번 반복 재생도 해 주셨다. 그런 선생님들께서 바라신 건 오직 ‘좋아요’와 ‘구독’뿐이었다.

     

처음에는 재료 준비가 힘들었다. 구입해 온 재료를 씻고, 다듬고, 써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재료 준비에 걸리는 시간은 차츰 줄었고, 시간이 줄어든 만큼 요리에 대한 부담도 함께 줄었다. 요리의 절반은 재료 준비임도 알게 되었다. 재료만 준비되면 한 가지 음식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닌 경우가 많았다. 준비한 재료를 냄비나 팬에 넣고 나면, 남은 것을 불 조절과 간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몇 년째 음식을 만들다 보니, 이제는 제법 일머리도 생겼다. 음식을 만들기 전에 냉장고 안을 먼저 떠올린다. 있는 재료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재료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음식을 만들려 한다. 가진 재료를 쓰지 못해 버리는 경우가 없도록 매번 신경 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종종 쓰지 못해 버리기도 한다. 재료를 살 때도 내가 만들 메뉴를 먼저 정하고, 목록을 작성해 구입한다. 이왕이면 여러 메뉴에 중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재료면 더 좋다.


재료 손질을 담당하는 부엌칼도 자주 갈아둔다. 잘 벼린 칼은 재료 손질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이제는 나의 공간이 되어버린 싱크대 주변도 늘 깨끗하게 유지하려 애쓴다. 음식을 먹고 나면 미루지 않고 바로 설거지를 한다. 그릇을 씻은 후 항상 싱크대 주변 물기도 제거한다. 찌든 때가 눌어붙지 않도록 개수대도 자주 청소한다. 깨끗하게 정리된 싱크대를 보면 기분이 좋다. 가끔 잘 정리된 싱크대가 가끔 내게 말을 걸기도 한다. 요리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고. 그럼 나도 앞치마를 꺼내 입으며 맞장구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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