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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 Apr 17. 2021

등락은 있으나 상승장


  예상치 못한 인생의 전개로 실수나 실패를 하고 만천하에 스스로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 겪게 되는 심리상태가 바로 '수치심'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누가 조종해서 만들어낸 마음이 아니고 안 좋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길거리를 가다가 대차게 넘어지면 무릎이 까져서 피가 철철 흐르는데 무릎이 아픈 게 아니고 마음이 아프다. 왜냐면 쪽. 팔. 려. 서. 수치심은 이렇게 단순한 '쪽팔림'부터 업무상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중대한 실수로 망작을 만들어 버리거나 프레젠테이션에서 장표의 내용을 잘못 말하는 등의 중차대한 '당혹스러움'등까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생각보다 뒤끝이 심해서 자주 불쑥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심리상태를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혹여 있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니까 시도의 크기와 상관없이 실패나 실수로 인해 '수치심'이 밀려올 때는 수없이 많이 반복된다. 수치심을 느낄 때는 주로 일이 잘 안되거나 스스로의 실수를 인정하고 고개를 숙여야 할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복합적으로 정신적 공황상태에 처하게 되는데, 이때 두 갈래 길 앞에 서게 된다. 수치심에 먹히고 주저앉을 것인가, 극복하고 일어설 것인가. '마음을 먹다'라는 표현은 '결심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수치심도 먹어버리고 재기하는 결심을 하면 더 단단한 마음이 자리하게 된다.

  결국 시도하면 실패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수치심도 생기고 하지만 결국 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면 인생의 굴곡에서 상승으로 가는 변곡점을 맞이하는 셈이다.


  가까스로 통역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제일 괴로웠던 공부는 전문 용어를 수집하고 정확하게 맞물리는 두 언어를 찾아내 자기만의 사전을 만들고 외우는 일이었다. 그중 가장 난해한 분야는 주식이었는데 내용이 복잡하고 하루에 수십 개씩 새로운 관용표현이 나오고 사라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여느 때처럼 경제 신문을 뒤지면서 전문용어를 정리하던 와중에 눈에 들어온 관용 표현은 '등락은 있으나 상승장'이었다. IMF 직격탄을 맞은 세대였던 그 시절, 토익점수를 끌어올리고 코피 터지며 공부했지만 신입을 뽑는 언론사가 없었고 애매한 나이를 커버하기 위해 얼떨결에 시험을 본 통역대학원에 들어왔다가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을 갖게 생겼다며 투덜거리고 있던 때였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통역이나 번역을 과제나 수업시간에 하게 되면 같은 반 학생들이 신랄하게 지적해주는 시간이 있었다. 시험도 물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진행된다.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입학한 사람들 사이에서 완전히 운 좋게 들어온 변종이었던 나에게 이 수업과 시험의 형태는 일종의 학대였다. 각종 시험을 볼 때마다 '아 나는 바보일지도'라며 자책하고 졸업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매일 매 순간 그놈의 '수치심'에 너덜너덜했던 시절이었다.

  잘난 맛에 살았던 대학 4년을 지나 자의 반 타의 반 가고자 했던 길에서 방향을 틀은 후, 인생 최대의 자존감 하락을 경험하고 있을 때 '등락은 있으나 상승장'이라는 표현은 암흑 속 한줄기 빛이었다. '야! 너도 인생 성공할 수 있어!'라고 등을 툭툭 쳐주는 한마디를 들은 듯한 위로감이었다. 나는 여기서 꼴찌라는 생각에 매일이 수치스러웠던 날 변곡점을 만난 것이다. 상승장에 서 있는 사람이므로 순간 덮쳐오는 수치심은 그냥 무시하거나 '더 잘 될 것'이라는 결심으로 마음을 먹어버리면 그뿐이었다.


   수치심을 이겨내는 방법을 간혹  '후안무치(厚顔無恥)'로 일관하는 경우도 있다. 두꺼운 낯짝으로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행태. 오히려 주변 사람들은 너무나 수치스러운데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은 변곡점을 맞이할 수 없다. 스스로는 결코 인생에서 하락장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자부하겠지만 등락을 거듭하고 변곡점이 많을수록 인생은 상승장으로 가게 마련이다. 잘못을 인정하기도 하고 못하면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비 오면 땅이 굳는다는 옛말처럼 수치심으로 적셔진 마음은 극복하면 더 단단해져서 인생을 상승장으로 이끄는 견인차가 된다. 시도하고 깨지고 상처 나며 자주 수치심과 마주할 지라도 결국 변곡점을 지나 상승할 것을 믿는다면 인생에서 망설일 일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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