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소리, 평화와 사랑의 소리 핸드벨!’ 관용표현처럼 따라오는 수식어는 벨을 놓은 지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나에겐 진짜다. 고요한 내 자리, 아무도 없지만 이어폰을 통해 듣는 핸드벨 연주곡은 Ave Maria,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 천공의 성 라퓨타(Laputa : Castle In The Sky)로 이어지고 있다. 연일 야근 중인 요즘, 핸드벨 연주곡들로 가득한 플레이리스트가 변함없는 노동요로 위안을 준다. 뻣뻣해진 어깨와 목을 움직이며 시간을 보니 벌써 저녁 8시가 넘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나니 갑작스런 허기가 느껴지며 당 부족을 알리는 듯 머리가 어질하다. 오늘도 출근한 지 12시간을 이미 넘겨버렸네. 그만 집에 가자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호두까기인형(The Nutcracker)이 흘러나와 다시 엉덩이를 붙인다. 고생한 만큼 특별한 애정이 있는 이 곡으로 마지막 기운을 얻어 귀가 해야지. Pluck, Ring Touch, Mallet, Thumb Damp,,, 악보 위 그려진 다양한 핸드벨 주법과 악상기호가 여전히 선명히 떠오른다. 빵빵(00)학번 대학 새내기로 핸드벨과 인연을 시작한 ‘안젤루스 벨콰이어’ 5기 그때의 나로 돌아간 듯이.
살짝 부딪혀도 현장에서 벌금 부과인, 내 몸보다 중한 핸드벨과 콰이어차임(또는 차임벨)을 조심스레 들어 가슴에 댄다. 호흡마저 맞춰가며 모조리 외워버린 연주 곡들이지만 내 음을 내야 할 그 순간 단 0.1초라도 엇박을 내지 않기 위해 핸드벨을 잡은 두 손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체력 좋은 스무 살 새로운 경험이라 열정이 넘쳤고, 동기와 선배가 좋아 연습이 고된 것도 금방 잊었기에 모든 것은 흥분이고 즐거움이었다.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핸드벨 정기연주회를 위해 100명이 넘는 단원들은 늦은 밤까지 한 데 모여 종만 쳤다. 손가락에 물집이 생겨 밴드를 여러 겹 붙이고, 조금이라도 발의 피로를 덜기 위해 방석을 두세 개 깔고 신발을 벗은 채 장시간 서서 연습했던 당시 나의 열정과 체력은 대단했구나. 결혼 후 욕심과 용기를 내어 핸드벨을 다시 잡고 OB팀 '아미꾸스 벨콰이어'로 다시 예술의전당에 섰던 2011년 1월, 11년이 지난 그 공연이 나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내 결혼식 신부입장보다 떨고 긴장한 건 물론, 공연이 끝난 무대 뒤에서 결혼식 식순 ‘부모님께 인사’ 때보다 열 배는 펑펑 울었었지.
토요일 저녁 모르는(?) 택배가 도착했다. 받는분의 7할은 남편이기에 대형 박스 크기를 보곤 발끝으로 툭툭 밀어 집안으로 들여만 놓는다. 몇 시간째 남편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현관 앞 그대로인 택배를 보고 이상하다 싶다. 그제서야 며칠 전 ‘지휘자 선생님’이 새해 안부를 전하시며 집주소를 물어보신 것이 떠오른다. 보내는분 란에 역시 선생님 성함 조**이 인쇄되어 있다. 박스 안 가득한 내용물이 들기름을 강조한 조미김 수십 봉인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송장을 확인한다. 선생님이 김을? 멋부린 포장의 커피나 쿠키도 아니고 정말 조미김 이라고? ‘안젤루스 벨콰이어’에서 처음 만난 지 22년이 지난 지금도 빨간 립스틱과 숏컷 헤어스타일, 여전히 44사이즈 몸매를 유지하시는 지휘자 선생님이다. 눈만 마주쳐도 어렵고 연습 내내 호명될까 무섭기만 했던, 20여 년 전 이미 철저한 저탄식단을 고집하며 진한 블랙커피를 손에 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평생 내가 기억할 분이다. 그런 지휘자 선생님으로부터 국민 모두의 친근한 밥반찬 김을 박스째 받은 것이 낯설기만 하다.
‘안젤루스 벨콰이어’, ‘아미꾸스 벨콰이어’라는 이름표는 전공자도 아닌 내가 악기를 사랑하고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연습-휴식-연습-식사-연습-휴식…이라는 일정으로 잠시나마 음악인의 삶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클(래식).알.못이면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라는 큰 무대에 연주자로서 여러 번 설 수 있던 건 꿈 같은 일이다. 허벅지까지 옆이 길게 트인 연주복을 입고 의자 없는 화장대에 걸터 앉아 올백머리에 화장을 했던 적나라한 여자대기실의 모습이 잊힐리야. 천상의 소리가 울리는 감동을 다시 한번, 가장 많은 단원을 동원한 핸드벨 연주회로 유종의 미를 거두자! 지휘자 선생님과 의기투합 했던 목표는 코로나의 영향으로 언제 이룰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몸이 부서져라 핸드벨을 연습할 수 있는 체력이 남아있을 때 꼭 한 번 더 무대에 올랐으면. 무대 뒤 찬 바닥에 같이 쪼그려 앉아 악보에 체크하고 집게를 꽂던, 센 무대 조명으로 필수 아이템인 새빨간 레드립스틱을 진하게 바르는 그 순간을 다시 만나고 싶다. “나 이제 환갑이란다.” 사실이지만 믿을 수 없는 말씀을 무심히 던지시는 선생님의 레드립이 더 선명해 보인다. “그래서 뭐 어때, 난 내 나이가 좋아!” 거침없는 특유의 말투와 군살 없는 몸 선을 보며 나도 내 인생 마지막 연주 드레스를 위해 체중 유지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고탄고지 식단을 포기할 순 없지만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는 소식과 주말 아침 10km 달리기를 앞으로도 20년 쭉 이어간다면 가능할 것이다. 선생님의 고소한 선물, 박스 가득했던 김을 주방 수납장에 차곡차곡 쌓는 걸 보며 아이는 김부자가 되었다며 신이 나 거든다. 김을 한 봉 뜯어 위에서부터 사이 좋게 한 장씩 젓가락으로 집는 일상적인 저녁 식탁에 앉아 미래 어느 날의 핸드벨 공연을 꿈꾸어 본다. 입 주위가 떨릴 만큼 활짝 웃는 미소를 유지한 채 두 손에 조심스레 든 핸드벨로 Ring, Lift↑, Shake~~ 무대에서 제대로 놀아 볼 마지막 무대를 기다린다.
January 29, 2022